공주 영명동산 선교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 사애리시(Alice H. Sharp) 선교사 –
서 만 철 (사단법인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
공주의 영명동산에는 110여 년 전 이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순교한 샤프(Sharp)목사를 비롯하여, 이곳 공주에서 34년간 공주 영명학교를 세우고 유지해왔던 프랭클린 윌리엄즈(F.E.C. Williams, 한국명: 우리암) 선교사의 맏아들로 미 군정시기에 하지(Hodge) 군정사령관의 정치고문으로 혼란한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보이지 않게 정부수립을 위하여 커다란 역할을 했던 조지 윌리암즈(George Zur Williams, 한국명: 우광복)와 8살 예쁘디 예쁜 나이에 풍토병에 꽃잎이 떨어진 그 여동생 올리브(Olive Williams)의 묘가 있다. 또한 공주와 서울에서 23년간 복음을 전한 아멘트(Ament, Charles C. 한국명: 안명도) 선교사의 아들 로저(Ament, Roger Allen)는 이 땅에서 2살을 넘기지 못하고 그 여린 육신을 영명동산에 남긴채 하나님 곁으로 갔으며, 1916년부터 9년간 공주에서 선교사로 봉직한 테일러 부부(Taylor, Corwin and Nellie) 역시 5살의 예쁜 딸 에스더(Esther)를 그들의 가슴과 영명동산에 묻은채 하늘나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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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영명동산에 있는 선교사묘역에 관한 나의 관심은 정말 우연이었다. 몇 년전 늦가을 어느날 등산길에 허물어져가는 초라한 봉분 몇 개와 그 초라함과는 달리 봉분마다 세워져 있는 여러 모양을 한 돌비석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의 죽은 나이가 34살, 2살, 5살, 8살 등 가슴 아픈 사연이 얽힌 선교사묘역임을 알고는, 가슴이 뭉클했던 적이 있었다. 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배울 만큼 배우고 이룰 만큼 이룬 편안한 생활을 접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가장 가난했던 조선 땅에 와서 이렇게까지 환란을 당하며 인내와 연단을 받았던 것일까? 그래서 어떤 소망을 이루어 낸 것일까? 신앙의 눈이 아니라면 정말 한심하고 어이없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공주와 충남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샤프 (1872-1906) 선교사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교역자로 일하다가 1903년 31살의 나이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서울에서 황성기독청년회(YMCA)에서 헐버트, 언더우드, 에비슨, 게일 등과 함께 초대 이사로 기독교 청년운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던 샤프목사는 1904년에 공주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되고 이듬해에 Alice H. Sharp(한국명: 사애리시)와 결혼하여 공주에 최초의 서양식 벽돌 양옥집을 짓고 이주하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이곳 공주에 선교부 본부를 두고 인근지역에 까지 농촌 선교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순회선교를 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 2월 한겨울 추위에도 불구하고 강경과 논산지역에 전도하고 귀가하던 중 벌판에서 만난 진눈깨비가 화근이었다. 인근의 산모퉁이에 있는 초가를 발견하고 잠깐 피신한 그 곳이 불행하게도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른 상여를 보관하는 상여 집이었고, 그 상여를 만진 것이 그만 죽음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신혼의 아내 앨리스의 정성어린 간호와 교인들의 눈물어린 보살핌과 기도가 있었으나 1906년 3월 5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부르심을 받았다. 샤프 선교사로서는 한국에 온지 3년, 공주에 정착한지는 채 1년이 안된 시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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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지역 근대여성교육의 어머니
엘리스 샤프(Alice H. Sharp, 한국명: 사애리시) 선교사는 1900년에 내한하여 서울에서 이화학당에서 교사를 하다가 1903년에 같은 캐나다 출신인 샤프선교사와 결혼하였으며 이듬해에 공주 선교부 일을 맡게 되어 공주로 남편과 함께 이주하게 된다. 1905년에 명선학당을 설립하여 여학생을 모아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후에 영명여학교가 되며, 이는 충청전역에서 근대여성교육의 시초가 되었다.
남편과 함께 선교를 하며 영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선학당을 설립하여 운영하던 결혼 3년차 신혼의 사애리시 부인에게는 남편 샤프선교사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고 모든 소망이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샤프 부인은 침착하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추진력과 인내가 뛰어난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었으며 그 일로 인하여 장례를 치른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영명 100년사”에서 전하는 사애리시 부인의 이별장면이다.
“사애리시 부인이 명선학당의 운영을 스웨어러(Swearer) 여사에게 맡기고 공주를 떠나던 날 교회와 학당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별의 슬픔위에 남편을 잃고 자신의 소망을 버리고 떠나는 사애리시 부인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보내는 사람들 모두가 가슴이 뭉클 하는 심정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야 그녀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진정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버리고 한국 땅을 떠날 결심을 했었다면, 남편의 유골함을 안고 귀국하지 않았었을까?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시 돌아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라던 바울의 고백을 실현하려고 사랑하던 남편의 육신을 영명동산에 남겨두고 홀로 떠났던 것이리라.
미국에서 약 2년간의 안식년을 보낸 샤프부인은 마침내 1908년 8월에 영명동산에 있는 남편 곁으로 다시 와서 선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1909년에는 강경 만동(萬東)여학교와 논산에 영화(永化) 여학교를 세웠으며, 이 땅의 여성들을 개화하기 위한 여성교육에 헌신하여 류관순과 같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길러내었으며, 해방 후 자유당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서울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 한국 최초 여자 경찰서장을 역임한 노마리아, 한국 감리교 최초 한국인 여자 목사 전밀라 등이 영명여학교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여성교육에 대한 공로로 1938년에 그의 공적비가 영명학교 내에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1900년에 내한하여 1940년 일제에 의하여 선교사강제철수 조치에 의하여 쫓겨날 때까지 38년간 한국에서 교육 선교에 헌신하였다.
류관순의 스승 사애리시 선교사
류관순은 13세이던 1914년에 사애리시 선교사가 운영하던 영명여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까지 2년을 공부하고 사애리시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교비장학생으로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류관순은 1919년 4월에 벌어진 병천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에서 2살짜리 조카 류제경을 등에 업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그는 후에 공주사법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애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애국지사인데 사애리시 선교사의 학비지원으로 학업을 할 수 있었다고 그의 일기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사애리시 선교사의 제자였던 한국 최초의 여성 경찰서장 노마리아 여사이다. 류관순 가문은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부모, 형제 및 조카까지 3대에 걸쳐 총 9명이 애국훈장을 받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가문인데, 그 핵심인 류관순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민족정신을 교육시킨 사람이 바로 사애리시 선교사인 것이다. 사애리시 선교사와 류관순 가문과의 관계는 이렇게 밀접하였으며 우리가 더 밝혀내고 기려야 할 커더란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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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제자가 회상한 사애리시 선교사
일제의 선교사 추방령에 의하여 69세의 나이에 한국을 떠난 그 이후의 사애리시 선교사에 대한 행적은 여태 다루어진 적이 없었다. 작년 늦가을 어느날 서울 예닮교회 선교부의 공주 영명동산 순례시에 만난 허리훈 전직 대사의 장모님이 사애리시 선교사님의 아끼던 제자이었으며 98세로서 미국 LA에 살고 계신 박한나 권사님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해가 가기전인 12월 29일에 허대사님의 주선으로 LA를 방문하여 박한나 권사님을 면담하게 되었으며 그분들이 간직한 일대기를 추적하여 43년 전에 작고하신 사애리시 선교사님의 마지막 거주하였던 곳과 납골묘까지 파악하게 되었다.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간호학교를 졸업한 후에 철도간호학교의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한국 간호학계의 큰 별이 되신 박한나 권사님의 가족은 그야말로 사애리시 선교사님의 교육으로 천지개벽하여 커다란 은혜를 경험한 가족으로서 그 가족사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됨을 100세를 눈앞에 둔 박권사님은 감사함으로 증언하였다.
박한나 권사님의 ‘한나’ 라는 이름도 사애리시 선교사님으로부터 받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다. 한나 권사님은 “하루는 영명동산의 계단 옆에서 사애리시 선교사님이 속이 안좋아 구토를 한 후에 발로 낙엽을 끌어와 덮는 모습을 보고 ‘저렇게 외롭고 쓸쓸하고 아픈데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인생을 사는 선교사님을 보고 불쌍하기도 하고 마음이 짠했는데, 내 평생에 그 모습이 선하다.”고 회상했다. 사애리시 선교사님은 아침이면 남편 샤프 목사님의 무덤을 향해 ‘오늘은 부여 갑니다’, 그 다음날은 ‘논산과 강경에 갔다 옵니다’ 하고 매일 얘기하듯이 보고하면서 일생을 그렇게 보냈으며, 항상 그녀의 올갠 위에는 아들같이 젊은 남편의 사진을 놓고 생활했다고 회상했다. 사애리시 선교사님은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웠으며, 올갠 반주를 해가며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찬송가를 늘 함께 부르곤 하였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박한나 권사에게 올갠 연주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박한나 권사는 이 떄 배운 실력으로 이후에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였으며, 100세를 눈앞에 둔 지금도 몇 곡은 피아노 반주를 하며 찬송을 하면 함께 사는 사위가 놀라곤 한단다. 찬송가 559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오며’ 와 304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 등 100여 곡 이상을 작곡하여 한국 찬송가의 개척자로 불리는 구두회 교수와는 이 때 주일학교를 같이 다녔다고 회상하였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행방불명된 독립군 아버지를 둔 오애리시를 입양하여 키우며 박한나 권사와 함께 세브란스 간호학교에 입학하도록 하였는데, 이들은 방학마다 공주에 내려와 사애리시 선교사님 댁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인근지역으로 사경회와 합창, 크리스마스 공연 등을 함께 다니며 전도했다고 한다. 한번은 샤프 선교사님의 묘소에 친구와 함께 갔을 때 사애리시 선교사님은 ‘앞으로 너희들이 샤프 목사님의 비석을 잘 돌보아 달라’는 특별한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한참 뒤에 친구와 함께 샤프선교사님 묘역에 갔더니 비석이 넘어져 있어 영명학교 황인식 교장에게 바로 세워 줄 것을 건의하였는데, 학교측에서 더 높은 곳에 있던 아멘트 선교사의 아들 묘가 있는 곳으로 옮기면서 비석도 똑바로 세웠다고 회상하며, 그 때의 사애리시 선교사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어 그분의 은공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게 되어 기뻤다고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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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애리시 선교사님은 1871년 4월 11일 캐나다에서 출생하였으며, 1972년 9월 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의 은퇴선교사요양원에서 101세의 나이로 ‘부름의 상’을 받으러 가셨다. 그의 육신은 파사데나의 품격 있는 납골묘원에 영구 안치되었다(Mountain View Mausoleum, Columbarium of Peace, Niche:00026 Row:PL2300, Morengo Ave., Pasadena, Los Angeles, CA). 그 분은 39년간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로 일하셨으며 33년을 캘리포니아에 거주하였다는 사망기록서 내용으로 볼 때, 1940년 한국을 떠난 이후에는 소천하실 때 까지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의 은퇴선교사요양원에 거주하였던 것 같다.
박한나 권사님의 남동생이 이민 떠날 때 ‘미국에 가면 꼭 사부인을 찾아가 감사인사를 드리거라’ 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에 따라 1972년에 사애리시 선교사님을 찾았을 때 안타깝게도 2주전에 소천 하셨다는 요양원 직원의 말에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방문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사애리시 선교사님의 쓰시던 방에 남겨진 유품이라고는 옷가지 몇별과 오래된 트랜지스터 라디오 한 대 뿐이었다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살다가 가신 선교사님의 고귀한 생애를 생각하니 돌아오는 길은 자기 삶에 대한 눈물의 회개시간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약 2시간의 인터뷰시간을 가진 뒤 방문한 사애리시 선교사님의 납골묘원은 그 겉모습과는 다르게 내부는 천지창조 천정화와 스테인드글라스, 아름다운 이태리산 대리석으로 마감한 품격 있는 납골 묘원이었으며 6대 째 한 집안에서 관리해오고 있는 특이한 곳이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시는 사애리시 선교사님으로서는 7~80 년 만에 애제자의 첫 방문이었고, 그분 인생의 꽃다운 시기를 다 바친 충남 공주 사람으로부터의 어쩌면 첫 방문과 헌화였는지도 모른다. 그 곳에서 3달 뒤에 100세 잔치를 앞둔 박한나 권사님의 평생을 사모하던 사애리시 스승님에 대한 즉석 기도 내용을 여기에 담는다.
“오늘 주님을 위해 일생을 외롭고 아프고 쓸쓸하면서도 주님의 사랑을 증거한 사애리시 선교사님의 납골당에 저희들 찾아왔습니다. 오늘 이렇게 귀한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20대에 남편 따라 고국을 떠나 우리나라에 와서 일평생 혼자서 외롭고 쓸쓸하고 아프면서도 주님의 사랑을 증거한 사애리시 선교사의 무덤에 찾아왔습니다. 주님 그의 외롭고 쓸쓸한 삶에 주님께서 항상 친구가 되고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그의 빛나는 삶을 본받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저희 신앙심을 주님께서 북돋아 주시옵소서. 주님,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 귀한 사랑을 증거 할 수 있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저희 각자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남은 여생 온전히 주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 많으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101세에 부름을 받으신 스승 사에리시 선교사님의 묘소 앞에서 100세의 제자가 드린 추모 기도내용의 핵심은 ‘주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삶’이었다. 박한나 권사님은 덕분에 꿈에 그리던 사애리시 선교사님이 잠들어 있는 묘소를 찾아내게 되었고 처음으로 기도와 헌화를 하게 되어 기쁘고 여한이 없다며 정말 감사하다는 표현과 함께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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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애리시 선교사를 남편 곁으로 !!
130년 전에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딛으며 뿌린 선교사들의 주님의 사랑이 열매를 맺어 이제 한국은 전세계 163개국에 2만 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견한 선교대국이 되었다. 이 땅에 생명의 피를 바치기까지 주님의 사랑을 전한 선교사들의 업적을 기리고 복음전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선교유적들을 온전하게 보전하여 선교정신과 함께 우리의 젊은이들과 후대에 전하는 일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충청지역 근대여성교육의 어머니이시며, 독립운동의 표상인 류관순에게 민족교육을 시킨 사애리시 선교사의 유골을 공주 영명동산에 잠들어 있는 그의 남편 묘소 옆으로 이장을 할 수 있다면 부부의 생전의 못다한 사랑의 아쉬움도 달래는 한편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커다란 교육의 현장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산사람이 움직이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분 인생의 거의 전부를 바친 충청도 공주에 사는 사람으로서 사애리시 선교사님의 묘지이장에 관한 논의가 공론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1> 공주 영명동산에 있는 선교사묘원. 사진 중간 좌측의 흰 비석이 사애리시 선교사님이 박한나 권사님에게 잘 부탁한다고 언급했던 샤프 목사님의 비석이다.
<사진 2> Sharp, Robert Arthur 선교사(1872-1906): Seoul, Kongju/1903-06
<사진 3> 공주 영명동산에 있는 선교유적인 등록문화재 제233호 ‘공주 중학동 (구)선교사가옥’. 샤프목사가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한 것으로 목록화사업보고서에 기재되어 있다. 1928년부터 6년간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사애리시 선교사로부터 배운 박한나 권사는 이 건물이 학교건물로 쓰였었다고 증언하고 있다.(사진:공주 중학동 구 선교사가옥 기록화 조사보고서, 문화재청)
<사진 4> Sharp, Alice Hammond (사에리시) 선교사(1871-1972): Seoul, Kongju/1900-40
<사진 5> 사애리시 선교사의 애제자인 LA 거주 박한나 권사(중앙, 98세) 인터뷰 후 기념사진(2015.12.29.). 사진 우측이 첫째 딸 부부(허리훈 전직 대사), 좌측은 필자와 금번 사애리시 선교사 행적 추적에 그의 남편과 함께 큰 도움을 준 셋째 딸.
<사진 6> Alice H. Sharp 선교사(1871-1972) 납골묘 헌화 (2015.12.29.).
사애리시 선교사님에게는 7~80 년 만의 애제자의 첫 방문이었고, 그분 인생의 꽃다운 시기를 다 바친 충남 공주로부터의 첫 방문과 헌화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