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

공주의 기독교 인물들

 

http://wookey.tistory.com/364

 

1957년 5월 27일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이기붕 당시 민의원 의장(이 대통령 오른쪽) 가족과 함께했다. 맨 왼쪽이 이 의장의 장남이자 이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이다.해방 후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그의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도구(tool)의 하나였던 영어를 중시하여 영어 잘하는 사람을 우대했다. 그래서 해방 전 미국유학을 다녀온 김도연(재무)·김태선(내무)·김현철(재무)·백낙준(문교)·윤치영(내무)·이교선(상공)·이기붕(국방)·임병직(외무)·임영신(상공)·장석윤(내무)·조병옥(내무)·조정환(외무)·최규남(문교)·최순주(재무)·허정(사회) 등을 장관에 발탁했고, 영국유학을 다녀온 신성모(국방·내무)·윤보선(상공)·장택상(외무) 등을 장관에 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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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Cau73/449e/623?q=%C0%D3%BF%B5%BD%C5%20%C8%B8%B0%ED%B7%CF

임영신의 자전적 회고록. 저자는 구한말 봉건주의 사회의 여성 비하, 무교육, 조혼 풍습에 반대하여 신식 학교를 다니고, 일제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독립 투쟁 지하 조직원으로 활동하다가, 3.1독립 운동 때에는 옥고를 치루었다.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교 유학, 이승만의 한국 독립 동지로서 활동 후, 귀국하여 중앙 보육학교를 인수, 오늘의 중앙 대학교를 세우고, 민의원, 초대 상공부 장관, UN 대표 등으로 활동하며 대한 민국 건국에 큰 공로를 세운 임영신 여사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1. 11. 충남 금산 출생. 전주 기전 여고, 히로시마 여자 전문대, 미국 남캘리포니아대 학사, 석사, 명예문학 박사. 중앙 보육 학교 설립, 중앙 대학교 총장, 여자 국민당 당수, 초대 상공부 장관, 민의원, UN 한국 대표, 제헌 동지회 회장. 미국 아이젠하워상, 대한 민국 청조 근정 훈장 수상. 1977. 2. 하느님 품으로 영민.

 

 

승당 임영신의 나의 40년 투쟁사

임영신 지음 | 민지사

정 가 : 11,000원

2008년 08월 20일 출간

ISBN-10 : 8973621637

ISBN-13 : 9788973621637

368쪽 | A5 | 1판

http://cafe.daum.net/mosesjung/5Wo/469?q=%BB%E7%BE%D6%B8%AE%BD%C3%20%BC%B1%B1%B3%BB%E7%C0%C7%20%C1%A6%C0%DA%B5%E9

성령의 여자 유관순..퍼옴

 

유관순 선생이 어린 나이에 그토록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함과 강인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관순이 모태신앙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유관순의 부모는 가난하긴 했지만 일찌기 기독교를 받아들여 개화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주변 친지들 역시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유관순의 작은아버지

유중무는 유관순의 고향 충남의 매봉교회 전도사로 사역했으며, 일설에 의하면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 1908년 매봉교회를 설립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매봉교회가 세워진 것은 1899년 스웨러 선교사에 의해서 였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1908년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 매봉교회의

부흥에 큰 역할을 한것인데…그 EO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이후 한반도에 거대한

성려으이 불길이 타오를 때다. 그런 의미에서 유중권은 부흥의 영향 가운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02년 생인 유관순은 모태 신앙으로 아버지의 뜨거운 신앙과 민족 의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유관순 이화학당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공주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사애리시 선교사(史愛利施·Alice J. Hammond, 샤프 부인)의 추천

덕에 가능했다. 샤프는 평양 대부흥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한 선교사중 하나다.

이화학당 재학시절에는 가까운 정동교회에 다녔다. 당시 정동교회 담임은

손정도 목사이다. 그는 1907년 평양 대부흥시 숭실학교 학생이었다.

그 당시 숭실학교 학생들도 강력한 성령체험을 많이 했는데…

소정도는 당시 부흥의 불꽃인 하디선교사의 집회에서 엄청난 성령체험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등..민족의 위기를 놓고 고민하며 기도하던 손정도는

성령을 체험하고 …사도행전 1장의 제자들 처럼 “이스라엘(한반도)의 회복이

이 때니이까?“..하고 새벽기도를 하며 간구했다. 그 때 말씀으로 깨달음을

주셨는데..“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고….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행1장8절)란 말씀이었다.

그후 손정도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어 평생 민족운동을 통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오직 땅 끝만을 지향하였다.

그 여정에서 정동교회를 담임하던 중 그 교회를 다니던 유관순이 이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 성령의 역사와 민족을 지향하는 정신을 유관순도 전수 받았을 것으로 믿는다.

아버지 유중권은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 간 유관순을 붙들고 ‘열심히 공부해 민족의

일꾼이 되라’고 늘 기도했다고 한다. 손정도 목사와 이화학당의 박인덕 선생은

그녀들에게 ‘조선의 막달라 마리아’가 되라고 가르쳤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년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대단한 여성 지도자이다. 그는 12제자들도 모두 도망가버린 뒤에도 주님의

십자가 현장과 무덤까지 찾아간 여성이요…남성 중심의 제자 그룹의 기록에 감추인

뛰어난 여성 지도자였다.

이화학당의 기록에 의하면 유관순은 당시 교내 기도실에서 많은 시간동안 기도에

전력했다. 그렇게 민족의 위기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다.

그것은 유관순이 어리지만 당돌한 집념으로 무언가를 추구했고 ..또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놀라운 사실은… 1919년 3월…아우내에 내려 온 유관순은 독립만세운동 직전 고향

매봉산에 올라가 3일동안 밤낮으로 기도했다고 한다.

그만큼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일사각오로 만세운동을 고민한 것이다.

당연히 그 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목숨을 거는 일이다.

그런 일을 앞두고 신앙 깊은 유관순이 하나님 앞에 처절한 간구를 올리지 않았을 리가

없고 하늘로부터 뜨겁고 확실한 응답을 받고 그 역사를 시작한 것이리라 믿는다.

이 사실을 아는 이가 거의 없다.

매봉산은 그의 생가가 있는 용두리 뒷산이다.

기도할 때마다 함께 데리고 갔던 조카 유제한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사흘동안 기도만 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뭔가 계시를 받은 듯 미친 듯이

기도를 마친 그 얼굴은 온통 환하게 빛이 났고 말에 힘이 있었으며,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난 모세처럼…성령으로 충만해진 모습인 것이다.

안중근이 자신의 거사를 ‘천명(天命)’..즉, 하나님의 명령으로 깊이 깨달았듯이..

유관순 또한 단순한 민족애를 넘어서서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의 의미로

그 일을 도모해 갔기에 그토록 어린 나이에 담대하고 놀라운 영향력을 끼친 것이다.

그가 서울에서 아우내로 내려와 실제로 만세운동을 벌일 수 있었던 데에는

주변 교회와 목사, 그리고 교회 신도들의 목숨을 내건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천안지역은 만세운동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 때 아우내에 내려온 유관순은 가장 먼저 천안읍 교회의 안창호 목사를 찾아

만세운동에 관한 일을 논의했다. 안 목사는 천안지역 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사람이다. 매봉교회에서는 유관순의 열정에 감동해 전 교인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뜻을 모았다.

유관순의 신앙과 믿음을 어려서부터 지켜봐 왔던 매봉교회 신도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지만…(성령으로 충만해진) 그녀의 설득에 모두가 감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관순은 거사 전날인 3월 31일 사흘동안 기도했던 그 매봉산에

다시 올라 봉화를 밝혔다. 이를 시작으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등 원근 24개의

산봉오리에서 봉화가 붉을 밝혔다. 그렇게 타오르던 봉화가 서서히 꺼질 때 즈음,

4월 1일의 해가 빛을 발하며 서서히 떠올랐다고 한다.

유관순은 거사 직전 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유관순기념 비문)

 

3·1운동 당시 조선 땅 2,000만 인구 중 기독교인의 비율은 불과

1.5% 정도였다. 20만명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그러나 유관순처럼 성령에 사로잡히고 민족을 뜨겁게 사랑하는

큰 그릇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찾아 보기 힘들다.

하나님 나라는 숫자에 있지 않다.

부흥도 숫자 놀음이 아니다.

그것은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다.

밀알이 되려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이가 얼마냐에 달려있다.

유관순은 부흥소녀의 원조다.

그는 부흥 역사의 분명한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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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report.kyobobook.co.kr/view/12143783/

공주 제일교회와 선교사 가옥으로 보는 선교사들의 활동

 

 

목차

Ⅰ. 조사 유적 소개

Ⅱ. 선교사가 본 공주

Ⅲ. 선교사의 전도 활동

Ⅳ. 선교사의 교육 활동

Ⅴ. 의의

 

본문내용

조사 목표: 1900년대 초 공주지역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의 전도 활동과 근대식 교육 활동에 대해 알아본다.

 

Ⅰ. 조사 유적 소개

  1. 공주 제일교회: 등록문화재 제 472호, 설립자 맥길, 설립년도 1903년, 건축 연도 1930년, 공주 최초의 감리 교회
  2. 중학동 구 선교사 가옥: 등록문화재 제 233호, 설계자 사, 준공 연도 1905년, 공주 최초의 양옥

 

Ⅱ. 선교사가 본 공주

당시 충남지역 지방 행정의 중심지(충청감영), 강한 보수 성향

→서양 종교가 자리 잡기 어려운 여건

스웨어러(W.C.Swerer, 徐元輔): 선교지로서 공주지역의 중요성 강조

 

<중 략>

 

조병옥(신간회 창립위원, 내무부 장관), 황인식(초대 충남도지사), 신현구(대한독립애국단 조직), 윤창석(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 유우석(유관순의 오빠, 공주지역 만세운동 주도)

 

현재에도 영명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인 것처럼 당시로선 획기적으로 여성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샤프 선교사 사망 후 한국을 떠났던 부인 사애리시 여사는 1909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명선 학교를 영명 여학교로 개칭하고 교육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후 영명 여학교 역시 영명 남학교와 마찬가지로 여성 독립 운동가 및 각계의 여성 지도층을 배출하게 된다.

 

유관순(영명 여학교 재학 중 사애리시 여사가 이화학당으로 전학시킴), 박화숙(성악가, 공주지역 만세운동 주도, 이묘묵의 부인), 김현경(공주지역 만세운동 주도, 유관순의 시신 인수), 노마리아(한국 최초의 여자경찰서장), 전밀라(한국 최초의 여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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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1907revival.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531

산길을 옆으로 돌아가면 붉은 벽돌의 서양식 건물이 한 채 나온다. 샤프 선교사 부부의 사택이자 당시 감리교 선교본부터다. 지금은 개인에게 팔린 상태다. 유 목사에 따르면 이곳은 당시 선교사들의 회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사애리시 선교사의 수양딸인 유 열사도 함께 기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100년이 넘었지만 페인트칠만 약간 벗겨졌을 뿐 한눈에 봐도 튼실한 건물인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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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7/25/0200000000AKR20120725163700005.HTML?did=1179m

 

<첫 여성경찰서장 노마리아를 아십니까>

 

국내 최초의 여성경찰서장으로 알려진 노 마리아의 사진첩도 전시된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에 따르면 공주 출신의 기독교 여성민족운동가 노 마리아(1897-1982)는 유관순의 사촌 올케로, 일제강점기 교육 운동 등을 펼쳤으며 1947년 경북 경찰국 소속 ‘대구 여성경찰서장’에 임명돼 6·25전쟁까지 활동하다 1953년 퇴임했다.

 

최태육 목사는 “6·25 전쟁 당시 북한에서 여성 특수 부대를 파견해 남측의 장교들을 포섭,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여성 특수 부대원들의 체포를 주도한 게 노 마리아”라면서 “대단한 활약을 했지만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6343337&code=23111111

이 밖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경찰서장인 노마리아(사진③·왼쪽)의 모습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독립운동가였던 유관순의 사촌 올케이면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노마리아는 백범 김구의 권유로 해방 후 대구에서 전국 최초의 여성 경찰서장(1949∼1953)으로 활동했었다. 미국 연합감리회 선교부가 1948년 5월에 발행한 선교잡지 ‘세계의 전망(World Outlook)’에 실린 사진도 눈길을 붙잡는다. 신작로에 30㎝ 높이로 막대기를 걸쳐 놓은 38도 경계선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미군의 모습(사진④)이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014111&code=61221211&cp=du

 

주말판/종교개혁일에 열어보는 한 장로의 일기

입력 2015-10-3
1919년 류관순이 만세 시위할 때 그 등에 업혀마르틴 루터(1483~1546)가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 독일의 신학자이자 사제였던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에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당시 교회는 제후, 귀족, 상인 등의 신분별 가격표에 따라 면죄부를 판매했다. 지옥에 간 자를 위한 면죄부도 있었다. 당시 교회의 부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루터의 반박문은 구교인 가톨릭교회로부터 신교가 나오게 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정신’을 담고 있다. 반박문 발표일이 개신교의 종교개혁기념일이 된 이유다. 종교개혁 498주년을 맞아 ‘교회 개혁’을 강조했던 한 장로의 일기를 30일 들춰봤다. 평생 교육자로 산 고 류제경(1917~2012) 장로는 1939년부터 약 70년 동안 114권, 2만1516쪽의 일기를 남겼다. 루터와 같은 교회 개혁의 꿈을 품고, 철저한 회개운동을 주창했던 그는 ‘루터가 다시 태어난다면 교회 개혁을 위해 다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라고 썼다.

그는 일제 강점기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동했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류관순 열사가 그의 5촌 당고모이다. 류 장로의 조부 류중무와 종조부 류중권, 류중권의 딸 류관순, 고모인 류예도가 모두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종조부는 만세운동 중 숨졌고 조부는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류관순은 고문을 받다 옥중에서 순국했다.

‘나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할아버지는 전도사이셨고 외할머니는 권사이셨다. 또 애국자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류관순의 부모이자 나의 종조부 종조모는 왜경이 쏜 총에 쓰러지셨다. 나의 조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다. 어머니는 내가 류관순 열사의 등에 업혀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말씀해주셨다. 나 자신도 일왕이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주장했다가 3년의 옥고를 치렀다. 3대에 걸쳐 독립유공자가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한다.’(98년)

류 장로는 교사였던 부친 류경석 장로와 첫 여성 경찰서장을 역임한 어머니 노마리아 장로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1941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사에 재직할 때이다.

‘일본이 마음껏 우리를 짓밟았을 때… 나는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로 기소됐다. 공주경찰서는 나를 잡아넣겠다고 작정하고 제자들을 구금하고 위협했다. 나는 제자들을 모두 풀어주면 그들이 한 증언을 모두 인정하겠다고 했다. 제자들은 풀려났다. 나는 대전 법정에서 판사는 법을 전공했고 법 정신에 서서 정의롭게 판결을 해야 할 것인데 억지로 죄인을 만드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일본은 머잖아 멸망할 것이다. 판사는 현해탄을 건널 때 이 피고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명심하고 정당한 판사가 되시오라고 했다.’(97년)

검사는 2년을 구형했고, 판사는 그에게 3년을 선고했다. 류 장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담대함과 민족주의자로서 기백을 갖고 있었다.

‘교회가 돈 봉투를 만들어 내는 곳이 되어서야…’

국가 교수자격심사위원회에서 불문과 교수 자격을 취득한 류 장로는 64년 공주사대 불어과 교수로 부임, 88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매일 일기에 신앙과 삶을 기록했다. 이덕주 감신대 교수는 “류 장로는 예레미야와 같은 노(老)선지자의 탄식과 기도를 일기에 썼다”고 평가한다. 류 장로는 외부 초청으로 말씀을 종종 전했다.

‘약 백여 명 성도가 참석했는데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끝나니 무슨 물건을 준다. 집에 와서 보니 봄 내의 한 벌이다. 지금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사례해야 되는 시대이다. 주님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그런 정신은 사라지고 그냥은 안 한다는 장사꾼 시대가 온 것이다. 설교의 대가를 받은 것이 개운치 않다.’(79년)

사례비와 거마비 관행이 남아 있는 한국 교계가 아프게 읽을 대목이다. 그는 프랑스 출신 사제로부터 불어 강습을 5년 동안 받았다.

‘프랑스 신부님 생일 축하연에 초대받았다. 한국 신부님을 중심으로 각 교회 회장단이 열심히 토론을 했다. 신부님은 교회의 주인은 평신도, 회장단은 신부가 교회 중심이라고 각각 주장하며 열을 올렸다. 나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상당히 큰 소리를 그쪽을 향해 말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라고.’(81년)

그는 본질에서 벗어난 교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어렸을 적엔 예배당에 가려면 연보(捐補)를 가지고 갔다. 捐은 버린다, 補는 돕다란 뜻이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 그 연보가 지출됐다는 뜻이다. 지금은 어느 교회나 연보라고 하지 않고 헌금(獻金)이라고 부른다. 교회를 화려하게 짓고 꾸며 가난한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되었다.’(84년)

‘뻔뻔스럽게도 돈 봉투에는 기도제목을 적게 했다. 돈봉투에 돈을 내면 그 기도제목이 이루어진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목사가 그 기도제목을 한 묶음 놓고 도매금으로 기도를 해준다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교회란 봉투를 만드는 곳이다.’(89년)

‘지금은 학식이 있고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장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평소에 수시로 목사에게 선물을 안겨주고 헌금과 십일조를 약간 많이 하면 장로 되기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90년)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초청하는 잔칫집”

류 장로는 교회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 썼다.

‘개혁에는 내적인 변화가 앞서야 한다. 나 자신이 생각을 새롭게 바꿔야 개혁이 된다. 본래적이고 근원적인 중심점으로 돌아가야 한다.’(93년)

‘종교개혁자는 스스로 자신을 개혁하는 자였다. 제도나 의식이나 종교지도자가 아닌 오로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며 하나님 말씀에 기꺼이 따르는 의지의 용사들이다.’(96년)

발췌된 일기를 보면 류 장로가 매우 직선적이고 강직한 인물로 느껴진다. 하지만 류 장로의 장녀 류희상(64·용두동교회) 권사는 “아버지는 매우 온화하고 유머러스하셨다. 우리 오남매 뒷바라지가 버거우셨을 텐데도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의 학비를 대셨다”고 전했다. 류 장로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행복이 깊어진다고 여겼고 행함을 강조했다.

‘마르틴 루터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성경 말씀에 따라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확실한 믿음을 통한 행함이 진실한 행함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행하는 자로 인해 기뻐하실 것이다.’(98년)

그는 어떤 교회를 꿈꾸었을까.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며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 초청한다. 그들이 그 잔칫집을 채운다. 먼저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은 그들을 기쁨으로 섬긴다. 참된 교회는 잔칫집 같아야 한다.’(2008년)

류 장로의 일기를 소장하고 있는 감신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최근 일기 일부를 발췌 편집해 ‘근원을 찾아서-류제경 장로의 교회 개혁 이야기’(신앙과지성사)라는 단행본을 냈다. 직접 발췌한 최태육 박사는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는 것, 크리스천이 말씀으로 돌아가고 친구와 이웃을 살리는 것,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류 장로의 교회 개혁 방향”이라고 설명한다. 류 장로는 자신의 성숙을 위해 매일 글을 썼다. 그의 일기는 교회를 바꾸려면 우리 각자가 매일 자기의 삶 속에서 ‘루터’가 돼 행동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C%98%81%EC%8B%A0

 

임영신

 

영명학교, 이화학당 교사 생활[편집]

 

1921년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를 졸업하고 귀국, 선교사 친구인 메리 쉐라(Mary Shearer)를 찾아가 그의 도움으로 공주 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의 교사가 되고, 그 해에 이화학당에서 교사를 구한다는 정보를 입수,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사로 출강하였다. 1921년 4월 딸들이 일본인들에게 끌려갈까 염려한 금산의 주민들이 그에게 자신의 딸들을 데려가줄 것을 요청했고, 그 중 9명을 선발하여 영명여학교에 입학시키고 이들의 생계를 지원하였다. 1학년 1학기 여름방학 때 9명의 소녀들을 데리고 금산으로 내려갔다. 공주군 영명여학교에 재직 중에도 지하 운동가들과 접선, 상하이 임시정부와 줄을 대었다.

 

1921년 10월 공주 YMCA 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강연에서 그는 ‘우리들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라는 주제로 강연,“만일 우리들이 그 희망을 버린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돕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들과 딴 사람들을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과 같이 계십니다.”라고 하였고 군중이 환호하였다. 이어 경찰이 강단으로 뛰어 올라오려 하자 청중들은 몸과 몸으로 벽을 만들었다. ‘왜놈들을 죽여라’하는 고함소리도 들렸고 경찰들은 후퇴했다.

 

이 사건으로 다음날 새벽 경찰이 기숙사로 와서 그를 공주경찰서로 연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구체적인 죄목을 들 수 없었으므로 쉐라 부인의 책임 하에 석방시켰다. 교사 증을 압수하면서“만일 당신이 그와 같은 연설을 다시 한다면 종신 수감될 것이오.”라고 경고했다. 며칠 뒤 경찰은 그가 아직까지 집행 유예(1922년까지)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때 도지사와 공주 시장과 공주 교육 국장이 나의 경력을 세밀하게 조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임당했다. 그는 공주를 떠나려 했으나 쉐라 부인의 배려로 영명여학교 병설 유치원의 교사가 되어 유치원을 운영하였다. 이때 신일용이 보낸 사람이 그를 찾아왔으나 거절하고 되돌려보냈다.

 

1922년 영명여학교 교사를 그만두었다. 이후 이화학당 교사로 있다가, 그해 9월 미국으로 건너갈 목적으로 여권을 쉽게 얻으려 일본에 갔다. 일본에 도착, 관동 대지진으로 아수라장이 된 일본 현지를 구경하였다. 곧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로 가서 이승만이 운영하는 동지회로 갔다. 1924년 이화학당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