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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건물 철거 아쉬움 공주 영명학교

교회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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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문에 실어 전한 복음
당시 건물 철거 아쉬움 공주 영명학교
 
2003년 05월 21일 (수) 00:00:00 전강민 기자 minslife@amennews.com
 
 

충남 공주지역에 처음 들어선 교회는 1896년 세워진 공주침례교회로 알려져 있다. 1903년에는 의료선교사 맥길(W. B. Macgill)에 의해 현재 공주 제일감리교회의 전신인 공주읍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초기 한국기독교선교의 기본적인 전략이었던 의료와 교육을 통한 복음전파가 공주지역에서도 실천됐는데, 복음이 신학문과 함께 들어오면서 세워진 학교가 바로 공주 영명학교(교장 오대현)이다.

교육사업의 시작은 1903년에 내한한 미 감리회 소속의 샤프(R. A. Sharp)목사 부부로부터 전개됐다. 샤프(Mrs. Alise H. Sharp) 부인에 의해서 1905년 공주영명여학교(일명 명선여학당)가 설립됐다. 이후에도 샤프 부인은 영화여학교, 만동여학교, 진광학교를 세우는 등 활발할 교육사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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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에 내한하여 1907년에 공주지역에 정착한 윌리엄스(E. C. Williams· 한국명 우리암) 선교사는 본격적으로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윌리엄스 선교사는 당시 공주에서 배재학교 학생이었던 윤성렬이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교육하던 가학교를 인수하여 영명학교를 세우고,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1921년에는 미 감리회의 선교기금으로 붉은 벽돌로 된 새로운 학교건물을 건축했다.

1932년 4월 1일에는 명칭을 영명실수학교로 개편했고, 일제 당국으로부터 인가를 획득하였는데 당시 교사 9명, 학생 45명의 규모였다. 하지만 영명학교가 민족정신을 교육한다는 이유로 1930년대 말부터 일제의 탄압이 심해졌고, 급기야 1940년에는 윌리엄스 교장이 강제 추방을 당했다. 결국 영명학교는 1941년 7월에 폐교됐다.광복 후 1949년에 남자 학교로 재건하여 영명상업중학교로 재개했고, 이후 영명중고등학교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공주지역에 신학문과 민족정신을 교육했던 영명학교는 현재 국립공주박물관 뒷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의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서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공주박물관 정문 바로 우측에 붙어 있는 좁은 오르막길로 올라가면 된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중학교 건물이 있고, 뒤편에 새로지은 고등학교 건물이 있다. 하지만 현재 영명학교에는 오래된 유적이 없어 안타깝다.

1921년 영명실수학교 당시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은 아쉽게도 지난해 여름 철거됐다. 학교 관계자는 “건물이 너무 낡아서 학생들이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고 철거이유를 밝혔다.

현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건물사이 건물터만 공터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영명학교가 복음과 함께 세워진 학교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교정 가운데 있는 윌리엄스 선교사 흉상과 여러 기념비들이 영명학교가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학교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윌리엄스 선교사 흉상과 샤프 선교사 기념비는 1985년 개교80주년 행사의 하나로 세워졌다. 그 외 1957년에 이미 제작된 윌리엄스 공덕비와 황인식 교장 공덕비도 함께 자리잡고 있다. ‘신교육 발원지’라고 적힌 기념비 역시 개교 80주년 기념으로 세워졌다.

 

 

신학문에 실어 전한 복음

당시 건물 철거 아쉬움 공주 영명학교

 

2003년 05월 21일 (수) 00:00:00 전강민 기자 minslife@amennews.com

충남 공주지역에 처음 들어선 교회는 1896년 세워진 공주침례교회로 알려져 있다. 1903년에는 의료선교사 맥길(W. B. Macgill)에 의해 현재 공주 제일감리교회의 전신인 공주읍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초기 한국기독교선교의 기본적인 전략이었던 의료와 교육을 통한 복음전파가 공주지역에서도 실천됐는데, 복음이 신학문과 함께 들어오면서 세워진 학교가 바로 공주 영명학교(교장 오대현)이다.

 

교육사업의 시작은 1903년에 내한한 미 감리회 소속의 샤프(R. A. Sharp)목사 부부로부터 전개됐다. 샤프(Mrs. Alise H. Sharp) 부인에 의해서 1905년 공주영명여학교(일명 명선여학당)가 설립됐다. 이후에도 샤프 부인은 영화여학교, 만동여학교, 진광학교를 세우는 등 활발할 교육사업을 펼쳤다.

 

1906년에 내한하여 1907년에 공주지역에 정착한 윌리엄스(E. C. Williams· 한국명 우리암) 선교사는 본격적으로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윌리엄스 선교사는 당시 공주에서 배재학교 학생이었던 윤성렬이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교육하던 가학교를 인수하여 영명학교를 세우고,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1921년에는 미 감리회의 선교기금으로 붉은 벽돌로 된 새로운 학교건물을 건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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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1일에는 명칭을 영명실수학교로 개편했고, 일제 당국으로부터 인가를 획득하였는데 당시 교사 9명, 학생 45명의 규모였다. 하지만 영명학교가 민족정신을 교육한다는 이유로 1930년대 말부터 일제의 탄압이 심해졌고, 급기야 1940년에는 윌리엄스 교장이 강제 추방을 당했다. 결국 영명학교는 1941년 7월에 폐교됐다.

 

광복 후 1949년에 남자 학교로 재건하여 영명상업중학교로 재개했고, 이후 영명중고등학교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공주지역에 신학문과 민족정신을 교육했던 영명학교는 현재 국립공주박물관 뒷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의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서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공주박물관 정문 바로 우측에 붙어 있는 좁은 오르막길로 올라가면 된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중학교 건물이 있고, 뒤편에 새로지은 고등학교 건물이 있다. 하지만 현재 영명학교에는 오래된 유적이 없어 안타깝다.

 

1921년 영명실수학교 당시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은 아쉽게도 지난해 여름 철거됐다. 학교 관계자는 “건물이 너무 낡아서 학생들이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고 철거이유를 밝혔다.

 

현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건물사이 건물터만 공터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영명학교가 복음과 함께 세워진 학교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교정 가운데 있는 윌리엄스 선교사 흉상과 여러 기념비들이 영명학교가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학교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윌리엄스 선교사 흉상과 샤프 선교사 기념비는 1985년 개교80주년 행사의 하나로 세워졌다. 그 외 1957년에 이미 제작된 윌리엄스 공덕비와 황인식 교장 공덕비도 함께 자리잡고 있다. ‘신교육 발원지’라고 적힌 기념비 역시 개교 80주년 기념으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