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

공주 영명중고등학교와 선교사의 발자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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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영명중고등학교와 선교사의 발자취 (1)

 

 

곰나루 전설 때문에 `웅진`(熊津)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수적인 도시 공주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 것은 1890년대 말이다. 그 변화의 흐름은 감리교와 침례교회가 이끌었다. 감리교회의 공주 선교는 미감리회 한국 선교연회에서 1896년에 수원과 공주를 한 구역으로 묶어 스크랜튼(W. B. Scranton)을 구역 담임자로 임명한 것에서 비롯된다. 스크랜튼을 비롯하여 스웨어러(W. C. Swearer), 존스(G. H. Jones) 등이 여러 차례 공주를 방문하여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였고 마침내 1903년 의료선교사였던 맥길(W. B. McGill)이 개척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맥길은 1903년 7월, 한국인 전도자 이용주(李用周)와 함께 공주에 들어와 공주군 남부면 하리동(지금의 중학동)에 자리잡았다. 맥길은 초가집 두 채를 구입하고 진료실과 예배실로 사용하였다. 불과 1년 사이에 20여 명의 교인이 생겨났고 그 가운데 8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맥길은 1905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했다. 선교부는 두 번째로 샤프(R. A. Sharp)를 공주에 파송했다.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에서 가르치고 있던 샤프는 1904년 여름 공주로 내려왔다. 윤성렬과 동행한 샤프는 우선 선교사들이 살 주택을 하리동 언덕 위쪽에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벽돌건물을 지었다. 이것은 1905년 11월, 공주 뿐 아니라 충청도에서는 처음보는 `서양집`이었다. 그러나 샤프가 이 집에서 산 기간은 3개월도 되지 못했다. 샤프는 1906년 2월 말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 논산 은진지방으로 갔다가 발진티푸스(이질)에 걸려 손도 못 써보고 3월 15일 공주 집에서 별세하였다. 길 가다가 진눈깨비를 피해 들어간 집이 하필이며 상여를 보관하는 곳집이었고, 그 곳에서 얼마 전 이질로 죽은 시체를 담았던 상여를 만진 것이 화근이었다. 그의 무덤은 영명학교의 새로 건축한 강당 뒤편 무덤 동산에 있다. (계속)

 

 

공주 영명중고등학교와 선교사의 발자취 (2)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기까지 35년 동안 공주 선교를 담당한 윌리엄즈(F. E. C. Williams, 우리암) 부부가 1906년 10월 공주에 왔다. 이듬해 스웨어러와 테일러(C. Taylor, 대리오), 케이블(E. M. Cable, 기이부) 가족이 합류했고, 계속해서 밴버스커크(J. D. Van Buskirk, 반복기), 아멘트(C. C. Ament, 안명도), 파운드(N. Found, 방은두), 보딩(M. P. Bording, 보아진), 사우어(C. A. Sauerm 사월), 올드파더(J. Oldfather, 오파도) 등이 내려와 공주 선교를 담당하였다. 공주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제일 큰 관심을 보인 것은 학교 건립이었다. 샤프 부인은 공주에 오자마자 1905년 가을부터 자기집에서 여학생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바로 `명선여학교`(明宣女學校)의 시작이다. 그는 1906년 남편을 잃은 후 미국으로 들어갔다가 1908년 다시 공주에 나와 일제말기 추방될 때까지 남편 몫까지 공주 선교에 헌신, 한국인들 사이에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으로 불렸다. 그녀는 명선여학교 후신인 영명여학교에서 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이곳 출신으로는 병천의 시골소녀 유관순, 해방후 중앙대를 설립한 임영신, 한국 최초 여자 경찰서장을 역임한 노마리아, 중대부속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박화숙, 한국인 최초 여자 목사 전밀라 등이 있다. 그동안 영명학교 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1921년 일제시대 건물인 영명실수학교 교사 건물이 작년 6월말에 학교 당국의 현실논리에 의해 철거되었다. 원래 르네상스 풍이었던 이 건물은 미국 선교부에서 보내준 `선교 1백주년 기념선교기금` 2만 5천 달러로 지어 1921년 10월 15일에 봉헌한 건물로 다락이 있는 양철지붕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었다. 지금은 철거된 건물터 입구 양쪽에 기념비들이 서 있다. 오른쪽의 `황인식 교장 공덕비`는 황인식 장로가 1949년 교장이 되어 영명의 재건 작업을 완료한 후 1957년 정년 퇴임할 때 영명 동창들이 세웠다. 같은 해 영명 동창들은 `창립자 우리암 선생 공덕비`도 세웠다. 이 공덕비는 1미터가 넘는 화강암 기단을 가지고 있어 어색한 모습인데 이 기단은 원래 1936년 우리암 교장의 근속 30주년을 기념해 만든 흉상을 얹어 놓았던 동상대였다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