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순국 94주기 추모예배를 드리고 | ||||
[투고-박윤억 목사]지난 9월 30일, 천안 매봉교회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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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천안 매봉교회에서는 ‘유관순 열사 순국 제 94주기 추모예배’가 열렸다. 매봉교회 담임인 박윤억 목사의 사회로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예배가 시작되었으며, 한백희 감리사(천안동지방)의 기도와 이자형 교수(이화여대)의 유관순 열사 약력소개, 이화여고 동창회 합창단의 찬양, 그리고 박종천 총장(감리교신학대학교)의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가 있었다. 이어서 김능진 교수(충남대학교, 전 독립기념관장)의 추모사가 있었고 호경기 목사(천안동지방 선교부 총무)의 봉헌기도가 있었다.이날 박종천 총장은 유관순 열사와 같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운 이들로 인해 오늘 우리가 있다며 이 나라를 잘 지킬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특별히 유관순의 항일 역사를 교과서에서 빼고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라는 주장이 있는 가운데 열려진 추모예배라 더 뜻이 있는 예배라 하겠다. 또한 이번 예배에는 독립기념관 후원으로 ‘학교로 보는 한국 근대사’를 사진으로 전시하여 이날 매봉교회를 방문하는 여러 관람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지령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매봉교회 전도사인 작은 아버지 유중무에 의해 신앙생활이 시작되었으며 선교사인 사 에리시는 유관순을 이화학당 2학년에 편입시켰다. 매봉교회는 1898년 스웨러 선교사에 의해 천안 최초로 창립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맞아 교인이 의병활동을 하여 3인이 총살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82가정이 동참하여 교회가 불타기도 하였다. 또한 1910년 한일병합을 맞아 진명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수학하였으며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소와 빨래 등으로 동료들을 돕기도 하였으며 방학이 되면 향리에 내려와 야학을 열어 가르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학생들이 교문을 향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교사들이 교문을 잠그며 가로막았다. 그때 앞장서 교사들을 질책하며 교문을 열어 줄 것을 항의하던 학생이 유관순으로 밝혀졌다. 조선총독부에서 각종 학교 휴교령을 내리자 유관순도 고향으로 돌아온다. 기차안에서 기차소리가 “대한독립 대한독립”으로 들릴 정도로 독립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천안에서는 천안읍교회 안창호 목사의 주도로 곳곳에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병천에서는 이종성이라는 학생의 주도로 만세운동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체포되었다. 매봉교회 전도사인 유중무, 조인원은 유관순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아우내장터에서 장날을 기해 일제히 일어나기로 결정하고 유관순을 연락책임자로 선정한다. 유관순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동네를 돌며 주민들에게 권고한다. 그리고 매봉산에서 기도하며 봉화를 올렸다.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교인들이 태극기를 나눠주고는 모이게 한 다음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유관순이 연설했다. 그리고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총칼 앞에 만세운동은 길지 않았다. 열아홉 명은 죽기까지 했다. 유관순은 칼로 상처를 입고 체포되기에 이른다. 공주감옥에서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는데 부당하게 나라를 빼앗았다며 재판석상에서 의자를 내던지며 항의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결국 5년형을 받고 불복하여 서울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다. 경성복심법원에서는 3년형을 받고 상고를 포기하였으나 영친왕의 결혼기념특사령으로 1년 6월형이 된다. 그러나 고문과 영향실조에 못이겨 9월 28일 오전 8시 20분에 순국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들어낸 인물이 아니다. 감리교 역시 친일파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지나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도 대응하지 못했다. 대응할 가치조차 없어서 일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그러나 유관순은 판결문에 제일 먼저 올라있으며 전도사인 유중무와 조인원이 다음 순서이다. 그리고 공주법원에서는 검사에게 항의하여 5년형을 받았지만 33인의 민족대표는 3년도 있었지만 무죄도 있었다. 그리고 친일분자가 영웅으로 만들어서 교과서에 실릴 수 없다면 다른 지도자들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참에 우리 감리교가 가지고 있는 유적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유관순은 우리 감리교회의 자랑이요, 민족의 보배이다. 그러나 매봉교회에 교단 관계자가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 다만 은퇴 후에 구경삼아 올 뿐이다. 정치자금으로는 많은 돈이 빠져나가도 유적지 보수문제에 대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각자 교회가 알아서 할 일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유관순을 이용한다. 그러나 유관순 순국에 대한 행사는 관심조차 없다. 천안의 매봉교회는 건축한 지 16년이 되었다. 교회 건물이 뒷산에 붙어있고, 건축 당시 물구덩이에 건축하여 습기제게작업에 매년 고생을 한다. 공사도 몇 번이나 하였지만 할 때뿐이었다. 이제는 전시실 석고천정마저 내려앉아 속히 보수공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누군가 관심을 갖는다면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보수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우리 교단을 사랑하고 유관순을 사랑하는 성도만이 할 일이다. 교단과 각 단체가 힘을 합한다면 자랑스런 유관순, 민족의 보배 유관순이 감리교회의 위상을 높여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이 감리교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http://www.kmctimes.com/member/login.html?backUrl=http://www.kmctimes.com/news/mailto.html?mail=webmaster@kmctime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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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버박물관 ] 국내_충남지역 근대교육 산실인 공주 영명학교 |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011-11-17 17:33:48 조회 : 1075 |
독립운동의 산실학교를 찾아서 충남지역 근대교육 산실인 공주 영명학교공주에서 미국 감리교의 선교사업이 시작되다 감리교의 선교정책은 교회 중심적인 교인 양성보다는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간접적인 선교활동을 펼쳐나갔다. 1901년 샤록스 선교사는 “학교사업이라든가 학생들의 자질, 성실성을 종합해 볼때 학교의 효율성과 가치는 교회나 선교회에 보람을 줄 뿐 아니라 한국을 복음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학교를 통한 복음화가능성을 강조하였다. 이곳 선교활동도 영명학교를 중심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반 교육과 함께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하였다. 공주지역을 담당한 최초 선교사는 1896년 수원·공주구역에 파견된 스크랜턴(W.B.Scranton)이었고, 뒤를 이어 1889년 서원보(徐元輔, W.B.Scranton 1871~1916)가 파견되었다. 1902년 충청도에는 주일학교 19개와 매일학교 6개가 있었다. 이는 정규학교가 아니라 성경을 읽기 위한 단순한 한글교육을 행하는 정도였다. 영명학교가 태통하다 1903년 의사인 맥길(W.B.McGill, 1865~1918) 선교사는 공주에 내려와 이용주와 함께 공주 남부지역에 초가 2동을 구입했다. 하나는 예배당, 다른 하나는 진료소였다. 2년 뒤 부임한 사(R.A.Sharp, 1872~1906) 선교사는 조사 윤성렬과 함께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한 윤성렬은 명설학당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선교사 부인인 사에리시(Mrs. Alice J, Sharp. 1993~1962)는 명선학당을 설립하여 여학생을 가르쳤다. 1906년 사 선교사가 순행전도 후에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우리암(禹利岩 F.E.C.Williams, 1883~ 1962) 선교사는 1906년 10월 후임자로 공주에 파송되었다. 우리암은 부임하자마자 윤성렬 도움을 받아 1906년 10월 15일 중흥학교를 다시 개교하였다. 교장 우리암은 1908년 고등과정을 설치하여 황인식·안사영·이종오 등 3명의 졸업생을 처음으로 배출했다. 이듬해에는 교명을 오늘날 영명학교로 바꾸는 동시에 심상·고등 양과를 병치하는 교육내실화를 도모하였다. 영원한 광명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다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에 나서다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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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약사 (성지순례코스)
작성자박미경|작성시간13.07.23|조회수137 목록 댓글 0
지역최초 사립학교와 유치원을 설립한 강경제일감리교회
강경제일교회는 1904년 덕유정에서 야소교청년교육회로 출발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창립되었다.
1908년 3월에 강경포구역을 신설하고 김리회로부터 파송 받은 이용주 전도인이 1대 담임자로 부임하였고
1905년 강경 남쪽 당시 전라도에 속한 황산포에 있었던 남장로교회 소속인 황산교회가 1912년 황산이 충청남도 강경에 편입되자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사들의 선교협정에 따라 1913년 장로교회와 통합하여 황금정 105번지에 황산감리교회가 되었다.
선교사 윌리엄스(F.E.C.Williams)가 1907년 6월 5일에 설립한 지역최초 사립 만동학교는, 교회가 설립한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으로, 선교사와 지역유지들의 후원과 참여로 시작되어 28명의 학생으로 교회 예배당에서 공부를 시작되었으며 1911년에는 46명, 1912년에는 57명의 학생으로 증가하였고, 1920년에는 100명을 돌파하였고, 1922년에는 200여명으로 꾸준히 증가하였다.
1913년 2월에 앨리스 샤프(Allice H. Sharp)사에리시 여선교사가 우암 송시열 강학소인 팔괘정(황산동 소재)에서 20명의 학생들로 만동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을 최초로 시작하였다. 그 후 여성교육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바뀌면서 학생수가 급격히 늘어 1916년 11월에는 만동여학교 신축부지로 황금정 102번지 369평을 매입하여 1917년에 학교를 신축하였다. 황산감리교회는 1919년 황금정 107번지에 건평 50평 규모의 서원보 선교사(W. C. Swearer)기념교회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만동학교부설로 여자 야간학교를 세워 주로 부인들로 이루어진 40명의 학생을 야간에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21년 5월 18일 김장생 강학소인 임리정(화안동 소재)에서 지역 최초 유치원을 설립하여 30명의 원아들(일본인 자녀3명 포함)로 이화여전 출신 김복희 선생으로 유아교육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1916년 이후 유아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선교사들의 자각이 일면서 교회나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유치원이 함께 부설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특히, 유치원은 임리정을 사용하였고 만동여학교가 팔괘정을 사용하도록 지역 유지들의 교육공간 사용에 대한 배려와 적극적인 협력으로 교회는 미래 꿈나무들에게 애국애족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교육하였음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본 교회는 경영난으로 애쓰다가 결국은 1938년에 만동학교를 폐교하였고 그 자리에서 유치원을 운영하였다.
그 후 1961년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이 중학교에 합격하고도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고 교회학교 교장인 진병선 장로가 진창옥(당시 소방대장)장로와 담임목사인 최종철목사와 상의하여 야간 중학교(웨슬레중학원)를 설립하여 강경소방청사 2층에서 운영하다가 62년부터 50여명의 학생이 모집되어 만동학교자리로 옮겨 강성중학교(고등공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주간으로 전환하여 10년간 83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바 있다.
그 동안 강경제일감리교회는 지역과 함께 하였고 특별히 교육에 대한 관심과 총력을 다하여 인재 양성에 노력한 교회이다.
http://photohs.co.kr/xe/1609n 한국기독교회사
글 수 20
조회 수 3974 추천 수 0 2010.03.03 23:13:33
photohs http://photohs.co.kr/xe/1609
◇ 공주 영명학교 ◇
* 학교명 영명(永明)은 ‘Eternal Brightness’ 즉 ’영원한 광명‘이라는 뜻이다. 영명의‘永’은 오래되고 긴 것을 의미하지만 영명학당에서는 기독교인들이 희구하는 ‘영생’<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明’은 한자에서는 ‘밝음’과 ‘분별함’과 ‘총명함’을 뜻하나 여기에서는 <창세기 1장 1-5절> 구절에 명시된 ‘빛’ 즉 ‘광명’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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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년 10월 15일 선교사 우리암씨와 스트란돈씨와 노병선, 오성근씨가 함께 학교를 세우며 교명을 중흥(中興)이라 칭한다. 열심히 교육하다가 1909년 6월 26일 교명을 영명이라 개칭하고 심상(尋常), 고등 양과를 병치하는 실립 인가를 얻은 후 학교 상황은 점점 발전한다. 1916년 재정부족으로 인하여 보통과는 폐지하고 학생은 공립학교로 보냈다.
1919년 4월 1일 공주시에서 영명학교 학생이 독립만세 호창에 참가함으로 학교가 일대 불운을 만나 교문을 굳게 잠그고 있다가 같은 해 가을에 개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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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암(Williams) 교장
1883년 미국 콜로라도주 뉴윈저에서 출생. 1907년 공주교회 담임목사, 영명학교의 설립자이며, 1934년 영명 남여학교 통합 교장이 됨.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당하고, 1962년 미국 센디에이고에서 별세. LA 프레스트 공원묘지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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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명남학교 설립자 우리암 |
* 우리암 가족 두 딸은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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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암의 선교활동 모습(1907년경) | |
* 영명 여학교 설립자 사애리시 |
* 한국인들 사이에 ‘사애시리’부인으로 불렸던 샤프 부인은 명선여학교의 후신인 영명여학교에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그는 우선 병천의 시골 소녀 유관순을 데려다 가르치다가 서울 이화학당으로 보내 ‘3.1 운동의 영웅’이 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그 외에 해방 후 자유당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서울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 한국 최초 여자 경찰서장을 역임한 노마리아, 한국 감리교 최초 한국인 여자 목사 전밀라 등이 영명여학교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
* 초창기 영명여학교 교사
여학교는 이 건물을 사용하다가 1918년 3층 양옥을 짓고 옮겨 갔다.(현 기독교 사회복지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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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학교전경 및 공주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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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학교전경 |
* 의병들을 붙잡아서 거리에서 즉결 처형하는 장면(당시 시대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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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시대 상황 (선교사 핸드북에 실린 사진) |
* 학교 다닐 나이에 여자 아이들은 주로 가사에 매달렸다. (테일러 선교사가 찍은 사진) |
* 사선교사는 공주에 도착한지 1년도 안되어 장티푸스로 영면하였다.
* 샤프 선교사는 하리동 언덕 위쪽에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벽돌 건물을 지었다. 1905년 11월 충청도에서 처음보는 서양집 즉 양관이 완성되었다. 공주 사람들은 이 집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부러운 듯 집안을 둘러보았다. “목사, 당신은 천당에 갈 필요가 없겠소.” “이렇게 깨끗하고 좋은 집에서 사니 천당인들 이보다 더 낫겠소?” 그러나 샤푸가 ‘천당 같은’ 이 집에서 산 기간은 삼 개월도 되지 않았다.
샤프는 1906년 2월 말,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 논산 은진 지방으로 갔다가 이질에 걸려 손도 못 써보고 3월 15일 별세하였다. 길 가다가 진눈깨비를 피해 들어간 집이 하필 상여를 본관하는 곳간이었고 그 곳에서 얼마 전 이질로 죽은 시체를 담았던 상여를 만진 것이 화근이었다. 샤프의 무덤은 그가 지은 천당 같은 집 뒤편 산 속에 마련되었다.
* 우리암의 두 아들 올리브와 죠지의 무덤이 샤프 무덤 앞 쪽으로 나란히 있고 그 아래쪽으로 테일러의 딸(Ester Marian, 1911-1916)과 아멘트의 아들(Roger, 1927-1929) 무덤이 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형의 무덤이 있는 공주에 묻히기를 원했던 죠지(우광복)의 경우를 빼고는 모두 병들거나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희생된 어린 2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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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옥 박사(가운데 줄 왼쪽 두 번째)와 우리암 선교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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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식 교장 | * 조병옥 박사 | * 유관순 열사 |
* 사선교사가 1905년에 지은
공주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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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애리시 선교 기념비 사애리시는(Mrs.Alice J.Sharp) 1905년 영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선여학당을 설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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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명 출신 또는 당시 영명에 재직한 교사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타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공주영명학교 출신으로 독립 유공자 표창은 받은 사람은 다음 과 같다. 유관순, 조병옥, 유우석, 윤창석, 노명우, 안창호, 김현경, 강 윤, 오익표, 조화벽, 정환범, 신현창, 안신영, 이규남, 이규상, 현석칠이며, 그 밖에 교사 출신 유공자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이규갑, 이애일라, 신현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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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명학교가 배출한 저명 인사로는 영명학교 교장, 해양대 학장과 충남 도지사를 지낸 황인식,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 동경 2.8 독립선언을 주동한 윤창석, 소설가 방인근, 전 주일대사 정한범, 기독교 감리회 총리원 감독과 연세대 재단 이사장을 지낸 변홍규, 홍콩 총영사 이요한, 공주 지역 3.1 운동을 주동한 유준석 등이 있다. 여성으로는 유관순, 임영신 외에 한국전쟁 때 피난처 대구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여자 경찰서장이었던 노마리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목사이며 무의탁자의 보호자인 전밀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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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충남 공주시 중동 31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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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 최초로 학교를 설립한 샤프 선교사| 선교사의삶(양화진)
송광우 | 조회 134 |추천 0 | 2006.01.18. 10:14
공주에 최초로 학교를 설립한 샤프 선교사
신호철장로 (양화진선교회장)
충남 공주시 옥룡동 산 33번지(영명동산)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가족 묘지가 있다.
공주에서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순직한 샤프(Sharp)목사를 비롯하여, 공주 영명학교의 초석(礎石) 윌리엄즈(한국명: 禹利岩) 선교사 아들로 미 군정청에서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으로 한ㆍ미간 국익을 위해 협력한 윌리암즈 2세(George Zur Williams, 한국명: 禹光福)와 그 여동생 올리브(Olive, 1909.10.11-1917.11.2) 묘가 있다.
그리고 1918년부터 1941년까지 서울과 공주에서 봉직한 아멘트(Ament, Charles C. 한국명: 安明道) 선교사의 아들 로저(Ament, Roger Allen, 1927.7.30-1928.10.4)와, 공주선교부에서 1916년부터 1925년까지 활동한 테일러 부부(Taylor, Corwin and Nellie)의 딸 에스더(Ester Marian, 1911.2.12-1916.7.7)의 묘도 있다.
이곳에는 현재 5기의 선교사 가족 묘비가 보존되고 있으며, 앞으로 묘비가 없는 이얼(Earl) 등 선교사 가족 묘지의 조사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자료수집에 도움을 주신 공주 영명 중ㆍ고등학교 오대현 교장과 교목실장 유혜종 목사께 감사드린다.
▲복음을 전하다가 순직한 샤프 (1872-1906) 선교사
로버트 A. 샤프(Sharp. Robert Arthur)는 1872년 3월 18일 캐나다 몬트리올 캐스드릴에서 감리교 전도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1887년 브루클린 유니언 선교사양성소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1900년 오벌린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오하이오 주 펜필드의 한 교회에서 교역자로 일한 적이 있다. 1903년 오벌린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1903년 5월 3일 무어(Moore, David H.) 감독의 집례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서울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한편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했다.
1903년 10월 28일에 조직된 황성기독청년회(YMCA)에서 헐버트, 언더우드, 에비슨, 게일 등과 함께 초대(初代) 이사로 선임되어 기독교 청년운동을 정착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1904년 공주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되고, 1905년 앨리스 H. 샤프(史愛理施)와 결혼하여 공주에 건축 양식이 특이한 최초의 벽돌 양옥집을 짓고 이주(移住)하였다.
그는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관계하지 않고 성경을 옆에 끼고 걸어 다니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농촌 선교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노방 전도와 교인들 가정을 수시 심방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며 사랑을 실천했다.
1906년 2월 논산지방을 순회 전도하다가 허허벌판에서 갑자기 진눈깨비를 만났다. 이때 멀리 떨어진 곳에 ‘상여집’ 초가를 발견하고 잠간 은신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발진티푸스로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르고 막 갖다 놓은 상여를 만진 것이 이 병의 감염 원인이 되었다.
부인의 정성어린 간호와 교인들의 눈물어린 보살핌과 기도가 있었으나 1906년 3월 15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순직했다. 그 동안 남편의 선교 활동을 도우며 명선학당의 운영과 수업에 혼신의 노력을 쏟던 엘리스 H. 샤프 부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의 유해는 부인과 교인들의 오열 속에서 공주 선교사묘역(명선학당 학교림)에 안장되었다.
▲충청도 최초 여학교 설립자 샤프 부인
엘리스 햄몬드 샤프(Sharp, Alice J. Hammond, 한국명: 史愛理施)는 1900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 상동교회에서 활동하다가 1903년 내한한 샤프 목사와 결혼하고, 남편이 공주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부부가 함께 공주에서 활동했다.
1905년 10월 5일 충청도 최초의 근대학교 명선여학당(영명학교의 전신)을 설립하고 2명의 입학생(陳永信, 朴楚姬)으로 학당을 시작했다.
샤프 부인은 젊은 여성답지 않게 침착하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추진력과 인내가 뛰어난 여성으로 널리 정평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명선여학당 육성에 정열을 쏟다가 1906년 남편이 순직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공주를 떠날 때의 모습을 “영명 90년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사애리시 부인이 명선학당의 운영을 스웨어러(Swearer) 여사에게 맡기고 공주를 떠나던 날 교회와 학당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별의 슬픔위에 남편을 잃고 자신의 소망을 버리고 떠나는 사애리시 부인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보내는 사람들 모두가 가슴이 뭉클 하는 심정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후 1908년 8월 다시 내한하여 공주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1909년 강경 만동(萬東)여학교와 논산에 영화(永化) 여학교를 세웠다. 1935년 공주 원명(元明)서당을 설립하였으며, 1938년 그의 공적비가 건립되었다. 그는 38년간 한국에서 교육 선교에 헌신하다가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귀환되었다.
<양화진 선교회>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5-12-12 (174 호)
https://ko.wikipedia.org/wiki/%EC%95%A8%EB%A6%AC%EC%8A%A4_%EC%83%A4%ED%94%84
앨리스 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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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해먼드 샤프(Alice Hammond Sharp)[1] 또는 사부인(史婦人)은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로 한국이름은 사애리시(史愛理施)이다. 유관순 전기에서 종종 미국 이름인 앨리스 샤프가 아닌, 한국이름인 사부인으로 소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활동[편집]
앨리스 해먼드 샤프 선교사는 1905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의 감리교회 선교를 위해 남편인 로버트 샤프 목사와 함께 한국에 온 사람이다. 공주시 영명학교 (현재 공주영명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남편 샤프 선교사가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질로 별세하자, 천안과 논산을 거점으로 교회, 영아육아원, 학교를 세워서 감리교회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을 하였다. 남편사이에서 자녀를 얻지 못한 그는 어렵게 지내는 가정의 소녀들의 교육을 후원했는데, 이들중에는 유관순과 박인덕이 있다. 샤프 부인은 논산읍내에 1909년 영화여학교와 진광남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진광남학교는 1913년에 폐교되었다.1928년에도 예배당을 세워 강경, 연산, 은진, 노성 지방을 순회하면서 사회복지활동,유치원설립등의 업적을 남겼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정년이 되어 미국에 돌아갔다.
http://m.grandculture.net/contents.aspx?use=&ct=B&ctid=B00001&contid=GC01902235&mode=2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개설]
충주와 개신교와의 만남은 서울에서 충청도에 이르는 길목과 무관하지가 않다. 길은 곧 사람과 문물, 그 모든 것의 흐름이자 통로이기 때문이다. 경부선 철도가 놓이기 전 충청도는 남도와 경상도 그리고 서울을 잇는 길목으로 세 갈래 길이 있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경기도 과천~시흥~수원~성환을 거쳐 충청도 천안~공주~은진을 지나 전라도 삼례로 이어지는 길이 그 하나요, 두 번째 길은 송파나루를 건너 경기도 광주~이천~음죽을 거쳐 충청도 충주에 이르러 연풍으로 해서 조령을 넘어 경상도 문경으로 가거나 단양으로 해서 죽령을 넘어 경상도 영주로 이어지는 길이다. 세 번째 길은 한강나루를 건너 경기도 판교~용인~죽산을 거쳐 충청도 진천~청주~보은~영동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 김천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세 갈래의 길 중에서 충주의 개신교와 관련이 된 길은 두 번째 길로 미국 감리교파에서 집중적으로 선교 활동을 벌였는데, 중심 포교 지역이 경기도 이천과 충주·제천·단양 등 충청북도 북부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충주 지방의 교회의 시작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이야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교파 및 교회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으며 때로는 교회 설립 기준을 각기 달리 제시하고 있어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선교 분할 협정]
충주 지방의 선교 역사 중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건은 1909년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사이에 충청북도와 강원도 지역에 대한 선교 지역의 분할 협정이었다. 선교사들의 각축으로 선교지를 두고 교파 간의 갈등과 극심한 경쟁을 피하고자 1892년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에 7개항의 협정을 맺은 것을 비롯해 수시로 선교지 분할 작업을 해왔는데, 1909년에는 충청북도와 강원도의 분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협정의 결과 청주를 중심으로 충청북도의 남부 지역은 북장로회 구역으로, 북장로회 구역이었던 강원도 원주와 충청북도 북부 지역(충주·제천)은 미감리회 구역으로 확정되었다. 즉, 충청북도의 연풍·청주·문의·영동·회인·청산·보은·청안·옥천·황간·괴산 일부는 북장로회 선교 구역이 되고, 미감리회는 충주를 중심으로 진천·음성·제천·청풍·영춘·단양·괴산 일부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충주는 기존의 장로회가 감리교로 편입되는 등의 과정 등을 거치면서 감리교 우세 지역이 되었다.
[전파 과정]
충주에 복음화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902년 이전으로 올라갈 수 있다. 1902년 감리회 『연회록』에는 초기 전파 과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미 우리는 목천과 진천뿐만 아니라 청주와 충주에서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금년(1902)에는 이 네 곳에서의 사업이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이 지역에 처음으로 믿기 시작한 덕들교회의 박해숙이 이곳에 와서 활동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버리고 속회를 조직했습니다. 넉 달 동안 열두 개 마을에서 속회가 조직되었고 470명의 새 신자가 생겼습니다. 나는 예배처로 사용될 집문서 네 개를 건네받았습니다. 그 중 한 곳에는 65가정이 있고 또 다른 곳에는 40가정이 있습니다. 나는 1월 1일 이후 두 번 이곳을 방문했는데 특히 이 지역은 정치적 불안이 아주 심하기 때문에 상당한 목회전 관심이 필요한 지역입니다.”
충주 지역의 복음 사역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이천 덕들교회 초대 교인 박해숙 권사였다. 박해숙은 충청도 출신으로 첫 개신교인이 된 사람으로 1901년 고향인 충청도로 돌아와 충주·목천·진천·충주 등지를 돌며 전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충주 지역의 복음은 1902년 이전으로 보는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충주 지역 선교에 공헌한 또 한 사람은 서원보 선교사이다. 서원보는 충주 지역을 방문하여 선교 사업을 위한 사전 조사를 한 후 사업 계획을 구상했으며 충주 인근 면소재지에 전도인을 배치했고 서울 본부에 그 결과를 보고했다.
이에 따라 1904년에 감리교의 충청도 지역 책임자로 샤프(R. A. Sharp)와 샤프의 부인 사에리시(史愛理施, Sharp. A. J. Hammond)가 이 지역에 파송되었다. 이들 부부는 1904년 12월 조사 윤성렬과 함께 충주를 방문하여 성서를 보급하고 1905년에는 서원보 선교사와 함께 사경회를 개최했는데, 이때 충주의 사경회에 47명이 등록한 것은 복음화의 터전이 마련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천 덕들교회 출신의 한창섭 전도사, 이천 출신의 김제안 전도사, 이문현 전도사 등이 이 지역 구역장으로 파송되어 전도는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충주 지역의 복음화 열정은 1909년 충주 지역이 미감리회의 선교지로 협약에 의해 결정됨으로써 더욱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충주 지역 최초의 교회는 아무래도 1905년 장로교로 시작한 충주읍교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충주읍교회는 “1905년 4월 10일 충주읍 금정동 74번지(현재 성서동 74번지)의 초가 8칸에서 김정현 전도사가 교인 3명으로 교회 개척을 시작했다”고 한다.
충주읍교회는 충주가 감리교 선교 지역으로 정해지기 전인 1907년 ‘감리교 충주읍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는데,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변경된 것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충주제일감리교회가 된 충주읍교회는 100주년을 넘긴 충주 기독교 역사의 중심에 있는 교회답게 감리교 선교 구역이 된 1909년 이후 1915년에 제3대 장춘영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그해 하구암교회·가금중앙교회·대소원교회·용원교회 등을 개척하는 등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장춘영 목사는 초창기 충주·제천·음성 지역 복음화에 획기적인 공을 세웠다. 장춘영은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맹골에서 태어난 의병 출신이다. 1899년 구연영(구춘경)과 함께 이천?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첫 권사로서 종교 서적을 짊어지고 충주·제천·음성 등지에 팔러 다니면서 전도를 하며 교회를 개척하였다. 1900년경에는 여주 최초의 교회로 알려져 있는 맹골교회를 설립하였고, 1919년까지 충주 구역을 담임하며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다.
충주가 감리교 선교 지역으로 결정되기 이전에는 장로교 전파도 활발했다는 것은 여러 자료가 증명하고 있다. 1897년 9월 5일 ‘장로회 회의 한말’과 같은 해 9월 15일 ‘조션 그리스도인 회보’의 기사에서 충주가 언급되고 있다는 것, 1898년 미국 북장로회 연례 보고서에서도 언더우드 목사의 충주 지역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 1902년 장로교 선교사가 엄정면 목계까지 나귀를 타고 왔다가 유봉리?임치수를 만나 1903년 같은 동리의 서하영 등과 함께 유봉교회를 세웠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지금의 충주제일감리교회가 최초에는 1905년 ‘장로교 충주읍교회’로 설립되었던 것을 상기해 보면 장로교의 선교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충주 지역의 개신교 전파 과정에서 특이한 것은 현재 대한예수교 장로회에 속해 있는 당시의 조선기독교회의가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충주 지역의 엄정·목계·문산·구룡·용포 등에 교회가 세워졌고, 감리교에 속해 있던 이들 교회들이 1925년 조선예수교를 내걸고 분리·독립하였다가 황해도에서 김장호 목사에 창시된 조선기독교회와 1928년 3월에 합병하였다.
충청북도 북부 지역은 충청도가 갖는 지역적 보수성과 산간 지역이라는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꾸준히 전파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 1996년의 ‘기독교 대한감리회 동부연회사’에서는 개인 전도 추진, 신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전도대 조직, 권사들과 함께 성서 보급, 부흥회 및 사경회, 평신도 양성 등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교훈으로 삼아야 것이다.
[현황]
충주 지역의 기독교는 2005년 100주년을 넘기기까지 장족의 발전을 하여 충주시의 기독교 인구가 2만 명 내외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전체 인구의 10% 미만의 수준으로 충주의 복음화 비율은 전국의 평균 수준을 밑돌고 있으며, 지역별 복음화 비율로 볼 때는 하위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충주에 거의 모든 교파들이 망라되어 전파되고 있음은 다른 지역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1909년의 선교지 분할에 따라 충주는 감리교 선교 지역에 속하게 되어 감리교단에 속한 교회와 교세가 가장 크다는 특징이 있다.
2000년 기준으로 파악된 교단별 교회 수를 보면, 장로교가 114개(통합측 45, 합동측 10, 기장 9, 기타 50), 감리교가 70개, 성결교가 21개, 침례교가 19개, 순복음이 24개 그리스도교가 16개, 구세군이 2개, 성공회가 4개, 기타 3개로 모두 273개 교회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교회 숫자에 대한 단순 비교를 하자면, 청주에 488개 교회가 있어 인구 비례로는 충주에 교회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감리교회의 경우 청주에는 66개가 있지만 충주에는 70개가 있어 충주가 감리교 우세 지역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교회도 청주의 12개보다 충주가 6개나 많고 성공회도 청주의 2개에 비해 충주에는 4개나 있어 2배나 많다.
개신교 관련 단체로는 충주시 기독교연합회, 충주시 성서화운동본부, 충주시 장로회, 충주 YMCA, 충주YWCA 등이 있다. 이 중 충주시 기독교연합회에는 210개 교회가 가입되어 있어 충주의 기독교 연합 최대 기구가 되고 있다.
[의의]
충주의 개신교는 개인의 영적 구원을 통한 교회 성장에 역점을 두고 선교에 힘쓰며 지역 사회에의 참여와 나눔을 통해 나름대로 헌신해 왔다. 최근에는 보다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위해 사랑의 쌀 나누기, 연탄 1만장 나누기, 헌혈, 장기 기증 캠페인 등 헌신을 통해 사회 구원에도 점차 관심을 가져가고 있다.
http://www.genealogy.com/forum/surnames/topics/hammond/5707/
Alice Hammond who married Robert Sharp
By Linda Jordan March 23, 2011 at 12:51:36
I am looking for information on Alice Hammond (I believe from California),who married Robert Arthur Sharp in Seoul Korea on June 30, 1903. She was a missionary in Korea until about 1940, when she moved to California.I am looking for birth and death dates, and an answer as to whether the couple adopted children from Korea, and information on these children.Any information on Alice or Robert appreciated.
http://koreanchristianity.humnet.ucla.edu/biographies/missionaries
Sharp, Alice J. Hammond (?): NM/Kongju/1909-40
Sharp, Charles Edwin (1870-1952): NP/Seoul, Chaeryông/1900-21
Sharp, Robert Arthur (1872-1906): NM/Seoul, Kongju/1903-06†
앨리스 해먼드 샤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m.grandculture.net/contents.aspx?use=&lc=GC045&ct=B&ctid=B00040&contid=GC04501137
[정의]
충청남도 천안 지역에서 활동한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개설]
앨리스 해먼드 샤프(Alice Hammond Sharp)는 남편 로버트 샤프 목사와 함께 1904년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었다. 앨리스 해먼드 샤프 선교사는 천안뿐 아니라 공주와 강경·연산·은진·노성 등을 순회하면서 사회 복지 활동과 교육 활동을 하였다. 한국 이름은 사애리시(史愛理施)이고, 사 부인(史婦人)이라고도 불렸다.
[활동 사항]
앨리스 해먼드 샤프는 남편인 샤프 선교사가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이질로 사망하자, 충청남도 천안과 논산을 거점으로 교회와 영아 육아원, 학교를 세워서 감리교회 선교 활동과 교육 사업을 하였다.
자녀가 없었던 앨리스 해먼드 샤프는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소녀들을 자식처럼 돌보며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앨리스 해먼드 샤프가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서 2년간 교육시키고 후원하던 소녀 중 한 명이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을 주도한 유관순이다. 1916년 선교 활동을 위하여 천안의 지령리 교회를 방문했을 때 유관순을 만난 앨리스 해먼드 샤프는 유관순에게 유학하도록 주선하였으며, 그로 인해 유관순이 이화 학당에서 수학할 수 있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난 후 정년이 되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http://www.yugwansun.kr/yugwansun1.php
연보
유관순열사 <연보
-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 이 해 12월 2일부터 10일간 광무황제 재위 40년 기념행사와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기념비전이 건립되고, 스웨어러 선교사는 목천지역에서 교회 사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고했다.
- 12월 7일 유관순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둘째 아들 유인석(柳仁錫)이 태어났다.
- 2월 9일 러시아와 일본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불안한 사람들이 안전을 구하기 위해 기독교로 많이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 유관순은 이 전후 시기부터 약 5~6세까지 탑원리에서 살았다는 증언이 있다.
- 11월 17일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해 감리교 지령리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같은 용두리의 조병옥이 영명소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 2월 목천군 청년회에서는 민영환과 조병세 두 충정공에 대한 분향소를 설치하고, 이분들과 같이 순국한 분들을 위하여 군내 복귀정에 사당을 만들었다.
- 7월 19일 광무황제는 일본의 압력에 의해 칙령을 발표하고 퇴위하였다.
- 4월부터 12월까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 8월 ‘충남 목천 이동면 대지령 야소교당’의 이름으로 82명의 교인과 동리사람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 조인원, 유중무(아들 유우석의 이름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임), 유중권 등 1운동의 주역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 9월 3일 아침 조치원 북쪽의 소정리 정거장이 의병부대의 공격을 받아 불탔다. 하반기부터 의병운동이 병천 주변에서 격화되었다.
- 가을(10월 말경) 목천 교회가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군의 총살형을 받고도 구사일생으로 한 사람이 살아나왔다.
- 9월 27일 목천군 기호흥학회가 출발했다.
- 목천군에서는 이 시기에 보명학교, 수신학교, 녹동학교, 진명학교, 장명학교, 명진학교, 병진학교와 그 후신 홍호학교 등 여러 학교가 설립되고 매우 활발하게 교육운동이 진행되었다.
- 지령리 유관순의 동리에서는 지령리예수교회에서 ‘진명(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 6월 12일 충북 진천의 다섯 개 학교와 병천학교가 연합운동회를 열었다.
- 이복언니 이계출이 시집가다.
- 사촌 유경석이 공주 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하고, 조병옥이 평양 숭실학교 입학했다.
- 8월 29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다.
- 막내 남동생 유관석(柳冠錫)이 1911년 1월 10일 태어났다.
- 오빠 유우석이 진주 유(柳)씨와 결혼했다.
- 사촌 유경석이 공주 영명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 조병옥은 배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 5월 27일 유우석의 어린 신부 유씨가 전염병에 걸린 친정부모를 간호하다 전염되어 사망하였다.
- 사애리시(Alice Hammond Sharp, 史愛理施) 선교사 주선으로 공주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 6월 6일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어 목천군, 직산군이 천안군에 통합되고, 면리에 큰 변화가 있었다.
- 조병옥이 미국 유학을 떠나다. 그는 『신한민보』14일자에 「독립의 희망봉」이란 글을 기고했다.
-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 서울 정동교회에 손정도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인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 공주 영명학교 보통과 2년을 마치고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하였다.
- 오빠 유우석이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하였다.
- 4월 3일 사촌 유경석(유중무의 장남)이 영명학교 출신의 노마리아와 결혼하였다.
- 유경석과 노마리아 사이에 조카 유제경이 출생하다.
- 유관순은 조카를 위해 뜨개질로 모자를 만들어 선물했다.
- 유관순이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 4월 1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하였다.
- 6월 감리교 연회에서 정동교회에 이필주 목사를 파송하였다.
- 8월에 미가 폭등으로 8월 28일 종로소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경성구제회미염매소의 판매소에서 민중소요가 일어났다.
- 10월부터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은 전체인구의 3명 중 한명꼴인 742만 2,113명의 환자가 발생해 그 중 13만 9,128명이 사망했다.
- 11월 11일 4년간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 3월 1일 1운동이 발발하였다.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 3월 3일 광무황제 국장례가 거행되었다. 이날은 시위가 자제되었다.
-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 3월 10일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 3월 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왔다. 유예도는 이 때 학교 선배그룹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금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 3월 14~3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각 마을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 3월 31일 유관순,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 4월 1일 아우내 만세시위 발발하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속장 조인원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다 부상당해 붙잡혔다.
-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 6월 유관순과 아우내 만세 주역들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에 따라 유관순과 이들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 6월 30일 유관순은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 8월 29일 유우석은 공주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 9월 11일 유관순을 제외한 병천과 수신.성남지역 시위 주도자들의 상고가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 1월 22일 광무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 400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였다. (2.8 독립선언)
- 3월 14일 오후 4시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목천 기미독립운동기념 사업회에서는 171명이라 함)이 교정에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 11월 6~11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천안지역 1운동 피해보고와 함께 수감 교역자에게는 20원, 기타 수감자에게는 5원의 구제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서대문 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 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http://m.gg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466
<스토리텔링 충청人-유관순> 꿈 많던 17세 소년 ‘독립투사의 아이콘’ 되다
기사승인 2014.11.25 23:38:37
– (43) 3·1 만세운동의 상징 유관순
천안 유관순 열사 사적지 천안시 제공 |
1919년 3월 1일 이종일이 태화관(泰和館·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음식집)에서 독립선언서를 크게 낭독하고 있던 때와 같은 시각, 파고다 공원에서도 대규모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한독립만세’라는 대중의 함성이 퍼지고 있었고, 그 안에는 이제 막 청춘인 17세의 소녀가 서 있었다.
4일 뒤인 3월 5일 서울역에서 다시 대규모이자 평화시위인 독립운동이 벌어졌고 그 소녀 역시 군중 안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약 30일 후 그 소녀는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는 이번엔 군중 가운데가 아닌 맨 앞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소녀는 많은 인파를 이끌며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유관순(柳寬順)은 그런 배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배짱 때문에 꽃도 제대로 피지 못했다.
◆독립운동의 계기가 된 이화학당
유관순은 1902년에 천안 동면 용두리(속칭 지령리)에서 유중권(柳重權)과 이소제(李少悌)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부친인 유중권은 구국의 신념과 방도가 기독교에 있음을 깨닫고 유빈기(柳斌基), 조인원(趙仁元) 등 지역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민중 계몽운동에 노력했고 이러한 영향은 자연스레 유관순에게 끼치게 됐다.
이후 1916년 유관순은 공주 감리교회의 햄몬드 샤프(Alice Hammond Sharp)의 추천으로 한 살 터울 사촌언니인 유예도(柳禮道)와 이화학당의 교비생(장학생)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촌언니와 함께 입학해서인지 유관순은 자신보다 선배들과 자주 어울렸고 1918년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다.
1918년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막 호기를 맞고 있을 때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인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를 천명하면서부터 조국의 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화학당에서는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은 해당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면서 조용히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독립운동에 처음 참여하다
이듬해 이종일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이 조만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규모 운동을 한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유관순이 다니던 이화학당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군데군데에서 나오고 있었다.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작된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대가 정동 덕수궁 뒤편에 있는 이화학당의 교문 앞에 도착했고 이화학당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당시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문을 막고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막았다. 이에 학생들은 항의했고, 유관순은 친구 몇 명과 함께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내 만세운동에 합류했다.
나흘 뒤인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에서 학생단 주도하에 수만 명의 학생, 시민들의 제2차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은 이때에도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경무총감부에 구금됐는데 다행히 이화학당이 경무총감부와 교섭해 다른 학생들과 같이 풀려날 수 있었다.
독립운동의 불길이 학생들에게도 번지자 일본은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사흘 뒤인 12일 이화학당 상급 과정의 선배가 유예도 등 10여 명의 지방학생을 불러 모아 고향으로 급히 내려가 독립자금을 모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유관순은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시작했다.
◆직접 독립운동을 꾀하다
독립자금을 모으고자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가난한 마을은 돈 한 푼 나올 곳이 없었다.
이에 상심이 컸던 유관순과 유예도를 돕기 위해 마을 어른들은 ‘차라리 만세운동을 벌이자’고 했고,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숙부인 유중무(柳重武), 지역 유지였던 조인원 등이 나섰다. 이들은 음력으로 3월 1일이 되는 4월 1일 병천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유관순은 비록 일본군에게 붙잡혔던 적이 있지만 금방 풀려났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니면 군경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근 지역을 돌며 유림대표와 큰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 만세운동에 서자고 설득했다.
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면서도 운동에 사용할 독립선언서를 구하기 위해 서울에 직접 다녀오기도 했다.
거사 하루 전인 3월 31일 밤 유관순은 거사에 참여하겠다는 의미로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폈다. 각지 마을의 산봉우리에서 이에 호응하는 횃불이 올라왔다.
◆천안에서 일어난 3·1운동
4월 1일 각지에서 약 3000명의 인파가 병천 아우내 장터에 모여들었다.
오후 1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고, 유관순은 남색 치마에 빨강 저고리를 입고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에 앞장섰다.
병천 일본헌병과 주재소의 헌병들이 곧바로 시위대를 제지했고, 총검으로 선두에 선 유관순의 큰 태극기 깃대를 쳐서 부러뜨리며 옆구리를 찔렀다.
헌병은 상처를 입은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고 주재소로 질질 끌고 가고 있었는데 유관순의 부모가 끌려가는 딸을 뒤따라가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만세를 외쳤다. 헌병은 총검으로 유중권의 왼쪽 배와 머리를 찔렀고, 유관순은 그 틈을 이용해 헌병의 손아귀에서 풀려나 피신할 수 있었다.
한편 유중무는 빈사상태에 빠진 유중권을 업고 유관순, 조인원 등 약 40명과 함께 주재소에 몰려가 일본 헌병에게 큰 소리로 항의했다.
유관순이 “우리는 나라를 찾기 위해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무기를 사용하여 우리 민족을 죽이느냐?”고 외치자 헌병이 총을 들이대며 유관순을 위협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죽이려면 죽여 보라”라고 크게 소리쳤고 유예도는 주재소장의 옷에 묻은 피를 손가락질하며 “저 피가 우리 민족의 피”라고 외치자 군중들은 크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주재소 근처에 약 1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들자 헌병들은 총기로 이들을 위협하면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조인원은 가슴에 총을 맞고 왼쪽 팔이 칼에 찔리는 부상을 입었고 유관순의 어머니를 비롯해 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를 잃은 유관순은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몰래 집으로 들어간 뒤 집을 빠져 나오려다 헌병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법정과 교도소 안에서도 계속된 투쟁
공주재판소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격렬한 법정 공방이 있었다. 유관순과 유중무, 조인원 등은 “모든 것은 내 책임 아래 진행됐고 다른 이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유관순은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해 내 민족을 죽이느냐”며 “오히려 죄는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17세 소녀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유관순의 말에 일본 재판관은 격분하고 이들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중 하나였던 손병희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는 점을 볼 때 이들이 받은 5년형은 매우 중형이 아닐 수 없었다.
아우내 만세운동 주도자들은 서울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했고 유관순은 징역 3년 등으로 감형됐다. 다른 이들은 최종심인 고등법원에 다시 상고했으나 유관순은 “삼천리 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고 하며 상고를 포기했다.
상고를 포기한 유관순은 서대문 교도소에 수감됐는데 옥에서도 만세를 외쳤다. 함께 수감하고 있던 이화학당 교사이자 여성독립운동가였던 박인덕(朴仁德)의 만류로 잠시 잠잠해졌지만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에 유관순은 또다시 교도소 안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했다.
이 때 일본군으로부터 갖은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됐지만 일본군은 치료를 거부하고 방치했다.
함께 옥살이를 했던 여성독립운동가 어윤희(魚允姬)는 “그 안에서 일하는 데 관순이가 모든 사람들한테 순진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일했다. 모자나 셔츠 같은 것을 뜨고 너무 충직스럽게… 하나를 뜨더라도 성의껏 해서 모든 사람들한테 신임을 받았다.
어린애가 무슨 일이든지 충직하고 책임감이 강해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 보지 못했다”고 그를 평가하면서 “하지만 배고픔과 외로움은 물론 무엇보다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화학당 교사들과 가족이 마지막으로 면회했을 때에는 유관순의 살이 썩어갔고 결국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교도소 안에서 눈을 감았다.
유관순의 시신은 약 보름이 지나서야 이화학당에서 인계받아 정동교회에서 간략한 장례의식을 거행하고 수레에 실려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 후 그 묘지는 일제의 도시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유관순의 애국혼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천안 병천면 용두리에 복원된 생가와 기념교회가 있고, 탑원리에 유관순 사우와 기념관이 있다.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자료=정내수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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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j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34 | ||||||||||||||||||||||||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
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5> –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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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톱이 빠지고 내 귀와 코가 잘리는 고통은 이길 수 있어”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사회개혁, 부녀자 계몽, 교육사업 등을 통해 자주독립의 길을 찾고자 흥호학교(興湖學校) 운영에 가담하여 인재 배출을 위해 노력하였고,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큰 아들 유우석(柳愚錫)은 공주영명학교에서, 둘째 딸인 유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유관순의 고향은 철도가 부설되기 전 서울과 충청남도 공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개신교를 전파하던 곳이었다.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고, 지령리에도 1901년경 이미 교회가 들어섰으나,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이 교회가 동참하는 등 애국활동을 펼치자, 그해 11월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일가인 유빈기(柳斌基)는 케이블(E. M. Cable, 한국명 奇怡富) 선교사와 함께 고향에 개신교를 중흥시키고자, 1908년 조인원(趙仁元) 등과 함께 불타버린 지령리 교회를 다시 세웠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선교사로 교회를 이끌면서 유관순도 5∼6세를 전후하여 개신교를 접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1916년경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으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이화학당에 편입학하였다. 유관순은 교비 유학생으로 보통과에 편입하였고, 유예도, 서명학(徐明學), 이정수(李禎洙)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5년 동안 같은 방을 사용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독립만세운동 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 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1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은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신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보면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소실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 자락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영혼을 안은 채 말이 없다. 1947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72년에는 유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됐다.
유관순 열사 관련 논란 ‘무엇이 문제?’ 유관순 열사 첫 학교 공주영명여학교? 이화학당?
유관순 열사의 첫 학교가 이화학당이 아닌 공주영명여학교인 것으로 확인됐다는 주장에 관심이 쏠린다. 천안시는 유관순 열사의 학교 기록을 수정해 달라는 충남향토연구회 박철희(72)씨의 민원에 따라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에 관련 내용을 질의한 결과 ‘유관순 열사가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 입학해 수학했다’는 답변을 지난 4월에 받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독립기념관 학술연구팀은 ‘이화백년사(이화여자고등학교, 1994)’와 ‘영명100년사(공주영명중고등학교, 2007)’ 등 각종 문헌과 자료 등을 종합 분석한 결과 유 열사가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서 2년간 공부한 뒤, 1916년 4월 이화학당에 편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 이에 따라 천안시는 유 열사의 학력 연보를 ‘1915년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 편입’에서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 2년 수학한 후 1916년 4월 이화학당 편입’으로 수정키로 했다. 공주영명여학교는 현재 공주시 중동에 있는 영명중·고교의 전신이다. 또 국가보훈처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도 각종 서적이나 인터넷 사이트, 인명사전 등에 기록된 유 열사의 학력 수정 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학술연구팀장은 “각종 자료를 고증한 결과 유 열사의 첫 학교가 이화학당이 아니라 공주 영명여학교인 것이 확인됐다”며 “국가보훈처 등에서 각종 서적이나 인터넷에 기록된 유 열사의 학력 수정 작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유 열사 학력 수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철희 씨는 30여 년간 교직생활을 한 뒤 2006년 대전 문지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한 향토사학자다. 박 씨는 “유관순 열사가 공주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소중한 우리 역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5월 6일 향토사학자 임명순 씨는 “천안시가 타 지역 향토연구가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 열사가 이화학당에 들어가기 전, 공주영명여학교를 다닌 것으로 수정했으나 이는 확신할 수 없는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오류”라고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천안시가 문의한 두 기관은 ‘영명백년사(2007년)’ 등을 참조해 답변했는데, 이 책은 미 한인교회단체서 2002년 발간된 잡지의 ‘사부인(사애리시 선교사)이 유관순을 공주로 데리고 가서 영명학교 초등과에 입학시켰다’는 내용에 근거해 집필됐다는 것. 이에 반해 임씨는 “유 열사가 영명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언이 있다”고 밝혔다. 유 열사와 같은 해 태어나 1917년 영명학교를 졸업한 유중영 씨는 “관순이는 영명학교를 안 가고 똑똑하고 성격도 좋으니까 사부인이 이화학당에 보내주마 하여 이화학당에 들어갔다”고 1988년 증언했다는 것. 임 씨는 “유관순 집안이 살기 어려운 생활을 해 사부인이 유관순을 공주에 데리고 간 건 사실이나 영명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어 향후 처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유관순 열사 뺀 교과서로 우리 역사를 가르친다?” 지난 2013년부터 고등학교에서 필수로 배우는 한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4종이 유관순 열사를 다루지 않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런 교과서를 채택한 고교가 전체의 60%다. 나머지 4종 중 2종의 교과서도 사진 설명 정도로 유 열사의 애국활동을 다룬다. 학생들은 유관순이란 이름 석 자와 관계없이 3·1 운동과 항일독립운동사를 배우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유관순 열사에 대한 교과서 기술이 빠지게 된 건 우연도, 실수도 아니며, 일부 편향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도라고 볼 수 있는 정황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최근 연구 성과를 근거로 “유관순은 친일경력이 있는 박인덕이 해방 후 발굴해 이화 출신의 영웅으로 만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가 근거로 한 연구 성과란 정상우 서울대 강사가 지난 2009년 한국역사연구회가 발간한 ‘역사와 현실’이란 학술지에 낸 논문 등을 말한다는 것. 이 논문에서 “이화학당 교사 박인덕과 교장 신봉조가 해방 이후 자신들의 친일이란 과거를 덮고 새로운 도덕적 권위를 부여해 줄 표상으로서 유관순을 발굴했으며,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엔 미군정 관료를 비롯해 우익계열 인사들이 포진했다고 써 있다. 유관순 열사는 친일과 우익인사들에 의해 재탄생됐다”는 게 논문의 요지다. ‘유관순 만들기’가 소설도 아닌 학술이란 이름으로 다뤄진다는 게 놀라운 일이라는 지적이다. 유관순 열사가 1919년 아우내 장터에서 주도한 만세 시위사건의 기록, 경성재판소의 판결문 기록, 서대문형무소 복역기록과 사진 등은 인터넷에서도 널리 공개돼 있다. 그런데도 일부 학자들이 이를 무시한 채 부풀려진 인물인 양 매도하며 고교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인 일이다.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야 한다. 편향된 시각을 가진 역사학자의 취사선택에 맡길 일이 아니다. 교육부는 유관순 열사를 다루지 않은 교과서에 대해 개정을 요구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요구에 주목해야 할 일이다. 한편 지난해 일부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에서 누락된 데 이어 초등학교 교과과정에서도 홀대를 받아 그 의미가 점차 퇴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3월 교육부에 따르면 새 교과과정에 따라 지난 2011년부터 5학년 1학기 국어 국정교과서에 등재됐던 유 열사와 관련된 기록이 올해부터 2학기 국어 교과서(5-2-나)로 옮겨졌다. 교육부 관계자는 “유 열사와 관련된 기록은 바뀐 과육과정에 따라 올해부터 2학기 10단원 전기문으로 옮겨져 유 열사의 일대기가 수록될 예정”이라며 “이번 교육과정은 지난 2009년부터 연차적으로 추진한 새 교과과정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천안의 향토사학자인 임명순 씨는 “초등학생들에게 3·1운동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유 열사와 관련된 기록을 3·1절과 광복절을 벗어난 2학기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 것은 시기적으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며 “때 늦은 교육은 독립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
http://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Yu_Gwansun
Yu Gwansun
Yu Gwansun
Yu Gwansun (December 16, 1902 – September 28, 1920) was a female Korean Christian patriot.
Yu joined the March 1st Movement for Korea’s independence from Japan while still a high school student. Along with others from the movement, she participated in peaceful rallies in Seoul on March 1 and 5, 1919, and then helped to organize a rally in her hometown a few weeks later. Arrested by the Japanese military police for her actions, she received a three-year prison sentence. Tortured by the prison guards because of her continued activism, she died of her injuries in September 1920 at age 17. Knowing the power of her example, the Japanese buried her inconspicuously.
Contents
[hide]- 1 Early years
- 2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 3 Aunae Marketplace Rally
- 4 Imprisonment, Torture and Death
- 5 Legacy
- 6 References
- 7 See also
- 8 External Links
- 9 Credits
Yu’s efforts for independence and justice would presage the later nonviolent work of Mohandas K. Gandhi and the Rev. Dr. Martin Luther King, Jr. Even though Yu only work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for 21 months, her name remains a source of strength and pride to Koreans even today, and has taken a place among the most beloved Korean patriots in Korean history.
Yu Gwansun’s childhood home in Yongduri, burned down in 1919, reconstructed in 1991
Early years
The second daughter among five children in the family of Yu Jungkwon and Lee Soje, Yu Gwansun spent her childhood in Jiryeongri, Edongmyeon, Mokcheongun in Chungnam province in Korea. Nearby was the Maebong Presbyterian Church that she attended. Recognizing the young girl as a talented student, American missionary Alice J. Hammond Sharp encouraged her to attend the Hakdang Mission School for Girls in Seoul, about 90 kilometers away from Cheonan. Yu entered the Ewha School in 1915, beginning in the middle school program. In 1918, she graduated from middle school, and began high school studies.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Woodblock used by independence movement to produce Korean flags, in collection of Yu Gwansun Memorial Hall
In 1919, Yu Gwansun and other Ewha Hakdang high school students including Guk Hyeonsuk, Kim Hija, Kim Boksun and Seo Myeonghak participated in the initial activities of the March 1st Movement’s independence rallies held in Pagoda Park and other areas in Seoul. A few days later, on March 5, she also participated in another rally for independence held at Namdaemun Station. On March 10, the Japanese occupation government ordered all middle and high schools temporarily closed. On March 13, Yu left Seoul and traveled back home to spread independence fever in Korea’s southwest region.
Aunae Marketplace Rally
Arriving home, Yu told her family about the independence rally that had been held in Seoul and in various places throughout the country, and encouraged them to work for independence in Cheonan, too. Along with her father, Yu Jungkwon and his younger brother, Yu Jungmu, she helped organize a rally to be held in the Aunae Marketplace in Byeongcheonmyeon on April 1, 1919. On March 31, the night before the rally, she lit a beacon fire on top of Mount Maebong, to gather people from all around the region to join in the rally.
About three thousand people participated in the Aunae Marketplace Rally. Cho Inwon read a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Yu Gwansun led the crowd in cheering for independence (독립만세). Japanese military police opened fire on the crowd, killing 19 and wounding many, 30 of them seriously. Among those killed were Yu’s father and mother.
Yu complained to the authorities that it was unreasonable for the military police not to allow the people to demonstrate, which led to her arrest and detainment by the Cheonan Japanese military police unit. In retaliation for her rebellious actions, the Japanese burned her family’s home to the ground. Her uncle, Yu Jungmu, went to the police headquarters to complain, carrying the body of his dead brother in protest. He served three years in prison for his actions.
Imprisonment, Torture and Death
Tried and convicted in district court in Gongju, Yu began serving her sentence in Gongju Prison. Later, on August 1, after an appellate court in Seoul reduced her sentence to three years, she was reassigned to Seodaemun Prison in Seoul. While in prison, she led a demonstration of prisoners on the first anniversary of the March 1st Movement. Because of her continued activism even while in prison, the prison authorities tortured her, and she died on September 28, 1920, at the age of 17, of injuries sustained during the torture. Two days later, she received an unceremonious burial in a public cemetery in Itaewon, Seoul. Her body disappeared when the cemetery was destroyed during the occupation.
Legacy
Seventy years after her death, a spot was chosen on the slopes of Mount Maebong, where she had burned the beacon light the night before the Aunae rally, to erect the Chohonmyo Memorial Tomb. With the tomb’s dedication on October 12, 1989, Yu’s spirit finally had a peaceful resting place. Memorial services are held at Chohonmyo each year on September 28, the anniversary of her death. In 2003, a memorial hall and museum was added to the memorial complex.
Stone marker commemorating the sister city relationship established May 1962 between Ehwa Girls High School in Seoul and Yu Gwansun’s birthplace of Jiryeong-ri (now Yongduri)
On March 1, 1962, the Korean government awarded Yu the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On May 30, 1962, the Ewha Girls Middle and High School Alumni Association made the village of her birth, Yongduri, an official sister city of the school in Seoul. In 1996, Ewha Girls High School awarded her an honorary high school diploma. Yu’s parents, Yu Jungkwon and Lee Soje, killed in the Aunae marketplace demonstration, received a presidential medal in 1963 and the Meritorious Patriot’s Award in 1991. In 1977, the government deeded the property and home adjoining Yu Gwansun’s childhood home to the surviving members of her family as compensation for their house being destroyed, and in 1991, her birthplace was also reconstructed on the site where it had been burned down in 1919.
References
- Posted placards and exhibit notes, Yu Gwansoon Memorial Hall, Tapwonri, Byeongcheon-myeon, Cheonan-si, Chungnam Province, Korea (on July 17, 2007)
- Posted placards, Patriot Yu Gwansoon’s Birthplace, #305, Yongduri, Tapwonri, Byeongcheon-myeon, Cheonan-si, Chungnam Province, Korea (on July 17, 2007)
- Posted placards, Tombs of Yu Jungkwon, Lee Soje and Yu Jungmu, Yongduri, Tapwonri, Byeongcheon-myeon, Cheonan-si, Chungnam Province, Korea (on July 17, 2007)
See also
- March 1st Movement
-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External Links
All links retrieved July 28, 2013.
- Korean History: Part 5: Korean History 1910 – Present – College of Humanities, The Ohio State University
Cred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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