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E. C. Williams
source of the following: http://www.kmcweb.or.kr/gamri/our-faith/pdic/data/pd116.htm[2005.08.23]
윌리엄즈(Frank[lin] Earl Cranston Williams, 1883. 8. 4 ~ 1962. 6. 9)
미감리회 선교사. 한국명 우리암(禹利岩)
미국 콜로라도 주 뉴윈저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덴버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그 해 여름에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그는 도착 이듬해(1907) 공주에 파송되어 1940년까지 근속하였는데 이것은 내한 감리교 선교사 중 한 지역에 가장 오래 머문 예가 되었다.
1906년 당시 공주는 경기도 이천 광주구역을 포함하여 공주지방으로 승격되었고 감리사는 스웨어러 목사가 담당했으며 1906년에 내한한 윌리엄즈가 공주에 파송되었다. 그는 그 해 10월 명선학교를 영명남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오늘 영명고등학교로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1907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공주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당시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던 부흥운동이 남쪽에서도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는데 윌리엄즈 역시 그 중심에 서 있었다. 1907년에는 경기도 여주에서 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강사는 주로 선교사들이었다. 1908년 케이블이 천안ㆍ공주지방 사업을 보고하는 글에 의하면 테일러(C. Taylor)와 윌리엄즈, 버딕(G.M. Burdick) 등 세 선교사와 함께 1908년 1월에 여주지역에서 사경회를 열었다. 부흥회 상황을 이렇게 보고한다.
“저녁 집회는 부흥회를 열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하셔서 회개와 고백이 잇달았다. …… 신도들은 큰 번민 가운데 그들의 죄를 눈물로써 회개하고 예수 안에서 용서와 평안을 얻었다. 성경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깨끗해지는 경험을 했고 사경반이 끝날 때는 1백 명 이상의 신도들이 죄의 용서와 성령의 확신을 가지고 새로 거듭나게 되었다.”
윌리엄즈는 또한 4월 8일부터 공주에서 안창호 목사와 함께 1주일 동안 부흥회를 열었는데 사흘째 되는 날부터 교인들의 자복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로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였다 하며 간음하였다 하며 속이고 도적질하였다 하며 우리 주를 입으로만 믿었다 하며 어떤이는 그간에 안창호씨를 원수같이 보았다 하며 슬피 애통으로 서로 서로 용서함을 받으며 서로 위로하며 날마다 이와 같이 일주일 동안을 지냈다.”
그는 학교 일로 바쁜 중에도 충남지역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는데 공주를 비롯, 천안ㆍ홍성지역이 그의 관할 구역이었다. 1908년 당시 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의 편지나 표가 있으면 일본군 작전지역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피의자들을 석방시킬 힘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윌리엄즈의 증언이다.
“이곳에서 의병(Righteous Army)이 비록 공주 40리 바깥에 머물기는 했지만 지난 일 년 동안 지방 전체가 이들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때로는 일꾼들을 시켜 벽돌을 가지러 보낼 수도 없었으니 일본군들이 강제 노역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매일 교인들이 내게 와서 일본군 장교에게 보여줄 편지나 ‘표’를 달라고 했는데 그걸 가지고 가서 억울하게 체포되어 매를 맞고 있는 사람들을 석방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한국인들에게 동정심이 갈 때가 많았지만 한 번도 그들을 도와준 적은 없었다. 아직 나에겐 이런 문제를 해결할 만큼 오랜 경륜이 없는 것 같다.”
그는 특히 농촌교회를 위한 실제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며 학교에서도 농촌지도자 배출에 역점을 두고 교육을 하였다. 이를 위하여 영명학교를 영명실수(永明實修)학교로 개편, 실업(농업)교육을 한층 강화하였다. 1940년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에 의해 본국으로 강제 귀환당한 후 인도로 부임, 가지아바드(Ghaziabad)에 있는 농업학교에서 봉직하였다.
1945년 8.15해방 후 미군정청 하지 중장의 농업정책 고문으로 다시 내한하여 활약하게 된다. 또한 한국에서 활동하였던 윌리엄즈 목사와 윔스 목사의 아들인 윌리엄즈 소령, 윔스 대위는 1945년 10월 5일에 임명된 11명의 미군정 행정고문 중에 6명이 기독교인이며 그 중 3명이 목사로 임명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45년 12월에는 미군정청의 국장대리 또는 국장에 한국인을 기용하였다. 이때 정일형 목사는 인사행정처장에, 영명학교 출신인 조병옥은 경무부장에 임명되었고, 류형기 목사는 조선인쇄주식회사 관리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청의 자문기관으로 1946년 2월 14일에 발족한 민주의원 의장에는 이승만이 선정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윌리엄즈와 선교사들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다시 선교사직에 복귀, 일본 나가사키에 부임하여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학교 재건에 전력하였다. 이후 1954년 캘리포니아에서 은퇴하였으며, 1962년 샌디에이고에서 별세하였다.
source of the following: http://chungdong.org/book/book_detailRead.asp?number=336[2005.08.23]
[선교지탐방] |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선교의 중심지 공주를 가다 / 우 쾌 제 권사 |
선교지탐방/ 정동샘편집위원장, 우 쾌 제 권사
wkj8111@hanmail.net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선교의 중심지 공주를 가다
정동교회에서는 삼백만 총력전도를 위해 지방개척전도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는 바, 공주지역에 견동교회 건축을 도왔고, 매년 여름에는 정동젊은이교회가 충청지역 미자립교회의 여름성경학교를 돕고 있어 공주지방의 선교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지난 4월29일 제3남선교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공주와 부여를 탐방하면서 선교역사를 정리하는 기회를 가졌다. < 편집실 >
서울에서 공주(公州)로 간 선교사들
공주에 선교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 일행과 함께 한국에 왔던 스크랜턴(W. B. Scranton)부인으로 부터였다. 그는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와서 여성교육과 의료사업에 관심을 갖고 당시 삼남지역의 중심지였던 공주(公州)를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스웨어러(W.C.Swearer) 여사에 의한 개척선교가 시작되었고, 1900년에는 의사 맥길(W.B.Mcgill)이 남자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공주에 내려와 의료와 선교사업에 임하면서 주일학교를 열어 성경공부를 시작으로 교육의 기초를 닦아나간다.
그 후 터틀(D. M. Tuttle), 구타벨(M. I. Guthapel), 에드문드(M. Edmund)와 같은 선교사들이 내려와 활동했고, 본격적으로는 캐나다 몬트리올 출생으로 1903년 한국에 와서 무어(D. H. Moore) 감독의 주례로 목사안수를 받고 1905년 공주지방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된 샤프(R. A. Sharp)목사의 선교사업과 그의 부인 함몬드(A. J. Hammond : 한국명 사애리시) 여사의 본격적인 교육사업은 명신여학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당시 공주에는 의사 맥길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 하리동 주택 옆에 샤프 선교사는 아름다운 서양식 저택을 짓고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이것이 공주에서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 된다. 그 후 몇 동의 건물이 지어졌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공주사범 기숙사(금혜사)로 활용되던 건물만이 남아 있어 선교유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
샤프(R. A. Sharp) 선교사의 비운(悲運)
샤프 선교사와 함께 공주에 내려온 사애리시 부인은 명신여학당을 설립, 교육에 열중하고 있을 때, 샤프 선교사는 논산 강경지방을 순행하면서 지방교회 개척에 총력을 경주한다. 그러던 어느 날 들판에서 갑자기 내리는 진눈깨비를 만나게 되자 동구 밖에 있는 조그만 초가집을 찾아 들어간다. 그런데 그 집은 발진티푸스를 앓다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고 막 갖다 놓은 상여기물을 보관하고 있는 상여집이었다. 그 집에 들어가 기물을 만진 것이 계기가 되어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06년 3월16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돌아가시게 되자 명신여학당(현 영명고등학교) 뒷산 학교림에 고이 묻히게 된다. 이를 안 많은 교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논산교회를 샤프 목사의 추모교회로 정하게 된다. 비통해 하던 사애리시 부인이 고국으로 돌아가 명신여학교는 문을 닫게 되고 선교의 길에는 어려움이 닥친다.
윌리암(F. C. Williams)
선교사의 선교와 교육사업
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 선교부에서는 샤프 선교사의 후임으로 미국 콜로라도 주 푸칼린스 출신 윌리암(F. C. Williams 한국명 : 禹利岩) 선교사를 선임하여 파송하게 된다. 그는 1906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개최된 제3회 한국선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인 베이턴(Alice Bayton [sic ; should be “Barton” (hangeulizable as 바르턴 or perhaps 바턴)]) 여사와 함께 공주로 내려가 명신여학당을 영명(永明)남학당으로 고쳐 교장에 취임하여 1940년 일본경찰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많은 애국지사와 종교지도자를 양성했고, 음악을 전공했던 부인 베이턴은 성가대를 조직, 교회음악 보급에 공을 세운다.
선교와 교육사업에 전념하면서 선교회의 재정이 삭감되면 본국의 친지들에게 기부금을 요청하여 살림을 꾸려 갔으며 학생들에게는 자활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 자신의 힘으로 학업을 계속해 가도록 하는 한편 의료사업에도 적극적으로 힘을 기울여 1927년에는 공주 기독의료원을 개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진료를 실시했으며, 유모학습반을 만들어 출산 전후 교육을 실시했고, 임산부에게는 무료검진과 출산 후 10일간의 산모와 아기를 돌보는 일까지 맡아 했다. 또한 1929년에는 농부모임을 만들어 과학적 영농을 선도, YMCA 요원들을 초빙, 양돈, 양계, 양봉, 임업, 잠업 등의 시범농장을 설립 경영함으로 농촌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독립과 사회개혁에 대한 투철한 교육이념은 많은 민족지도자들을 배출시켰다. 대표적인 인물로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 박사를 비롯하여 황인식(초대 충남 도지사), 윤창석(동경 2.8독립선언 주도), 변홍규(감리교 총리원 감독), 정한범(주일 대사), 이요한(홍콩 총영사), 민태식(충남대 초대 총장), 강신명(장로교 총회장, 숭실대 총장), 표용은(기독교방송국 이사장) 김기웅(충북 초대 감독)등은 물론 여성지도자들로는 유관순 열사 및 임영신(중앙대 총장), 노마리아(최초 여자경찰서장), 전밀라(최초 여자목사) 등을 길러낸다(영명 90년사 참조).
몇년 후 100주년을 맞는 이 학교가 삼남선교의 선교기지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감리교의 교단적 차원에서 보다 많은 관심과 기도와 도움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선교기지로 다시 세워지기를 바랄 뿐이다.
협산자(俠傘者) 예배당과 개척교회들
선교와 교육사업이 활기를 띠던 당시에 교인 수는 늘었지만 예배처소는 맥길 선교사가 마련한 하리동(下利洞) 초가 두 채와 샤프 선교사의 살림집만으로는 부족하여 넓은 예배당을 필요로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교인들은 대책이 없어 오직 하나님께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선교사께서 본국으로 돌아가 사정을 호소했지만 선교부의 도움만으로는 힘에 벅찬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산을 낀 한 신사가 지나다 그 사정을 듣고 내 재산을 하늘나라에 쌓아 두고 싶으니 선교를 위해 써 주시오 하면서 많은 돈을 헌금 해 주었는데 신분을 밝히지 않아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드려진 재원으로 공주에 최초의 예배당을 짓게 되어 예배당 이름을 우산을 끼고 가던 사람의 헌금으로 지었다하여 협산자(俠傘者)예배당이라 했다고 한다. 이 때는 남녀 반을 달리해야 했기 때문에 기역자(ㄱ)형으로 지어 남반과 여반으로 앉아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공주는 전통적 양반도시로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연립주택이 들어 서 있고 자리를 옮겨 새로 지어진 교회가 공주제일감리교회다. 공주를 중심으로 시작된 선교활동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및 농촌계몽운동을 병행하여 각 지방의 목사와 전도사를 도와 교회를 개척하여 경천, 부여, 논산 및 홍성, 서산 등 충남의 각 지역으로 선교영역을 넓혀갔다.
감리교단의 삼남연회 부흥의 불길은 역시 최초로 길을 열었던 공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제주도까지라도 감리교의 약체지역이 없어지는 역사가 나타나리라 믿고 삼남지역에 선교를 시작했던 초기 선교사들의 업적과 함께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선교전략이 수립되기를 바라면서 제1차 선교지탐방을 마치고자 한다.
source of the following: http://user.chollian.net/~ikch0102/n-48.htm [2005.08.23] or http://user.chollian.net/~ikch0102/n-48.pdf
2001년 5월 12일 발행(제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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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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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1회 연구모임 주제발표(2001. 4. 7)
충청도 지역 감리교 전래수용과정
고성은(광리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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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공주지역
충청남도 강경·공주·칠산(부여)에 가장 먼저 자리잡은 것은 침례회의 엘라씽 기념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1895년에 제 1차로 내한한 엘라씽 기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서울에서 전도활동을 하는 가운데 충청남도 강경에 살면서 포목장사를 위해 서울에 올라온 지병석에게 최초의 침례를 베풀게 되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하여 엘라씽 기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1895년 충청도에 선교 거점을 확보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는데, 서울에 확실한 선교 거점을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1896년 제 2차로 내한한 엘라씽 기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과 함께 모두 1896년 초반 해로를 통하여 충청도에 내려오게 되었다. 파울링(E. C. Pauling) 선교사 부부와 가데린(A. Gadeline)선교사는 지병석이 살고 있던 강경읍 북옥리 137번지에 자리를 잡고 선교 사역에 착수하였고, 스테드맨(F. W . Steadman) 선교사, 에클스(S. Ackles)선교사, 엘머(A. Ellmer) 선교사는 공주읍 반죽동 109번지에 자리를 잡고 선교 사역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곧 다른 선교사들은 귀국하게 되었고, 1900년부터는 홀로 사역하던 스테드맨 선교사마저도 1901년 4월에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가 귀국하기까지 그의 어학선생이었던 오긍선이 그의 사역을 도왔다. 그의 선교 사업은 칠산·강경 지역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있었으며, 공주 지역에서도 약간의 신자가 있게 되었다. 스테드맨 선교사는 그 곳에 선교 거점을 확보하려는 미 감리회의 요청으로 땅 매매문제를 가지고 18개월 동안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귀국할 때 강경·공주·칠산의 모든 선교 사업을 원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침례회 선교사 펜윅(M. C. Fenwick) 에게 넘겨주었다. 아마도 스테드맨 선교사가 귀국하자마자 북 장로회의 민노아 선교사도 공주에 선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방문한 것 같다.
하지만 공주에 선교 거점을 마련한 것은 미 감리회였다. 1892년 미 감리회 해외선교부 연례보고서에 보면 미 감리회에서는 서울 이남 지역을「수원·공주구역」이라 정하여 공주를 충청도 선교 거점으로 확보하기 위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여 1893년 유능한 전도인 유치겸을 공주에 두 번이나 보내기도 하였고, 1896년 스크랜튼 자신이 수원·공주 구역에 관리자가 되어 공주 지역에 대한 선교적 관심을 강력하게 표명하였지만 공주에서의 선교 사업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지체되었다. 서원보 선교사는 침례회의 스테드맨 선교사 철수이후 공주에서 사역할 조사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1902년 가을에는 김동현 전도사를 구할 수 있게 되었고, 김동현 전도사는 관찰부(현 반죽동) 앞에 집을 하나 사서 거기서 주재하면서 전도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주제일교회는 1902년 가을이나 늦어도 겨울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동현은 수원에서 옥고를 치른 후휴증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되어 더 이상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후 1903년 원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의료 선교사 맥길(William. B. McGill)과 이용주 전도사가 와서 하리동(현 옥룡동)에 초가 2동을 구입하게 되었고, 맥길 선교사의 의료 활동 덕택인지 김상문, 육월나, 백정운 내외, 배리백가 등 5명의 교인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주에서의 실제적인 사업의 기초를 놓은 것은 1904년 샤프 선교사 부부가 공주에 오면서부터이다. 이들 부부에 의해 교육사업이 시도되었다. 1904년 샤프 선교사는 윤성렬을 교사로 하여 명선학당(훗날 영명남학교)를 설립하였고, 샤프 부인(A. J. Hammond, 사애리시)은 허 조셉 전도부인을 교사로 하여 두 명의 학생을 가지고 명선여학당(훗날 영명여학교)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샤프 선교사가 그의 노력으로 공주에 선교사 주택을 건축하였고, 미래에 충청도가 한 연회가 될 비전을 가지고 충청도 지역을 누비면서 열심히 전도 활동을 하던 가운데 갑자기 1906년 3월 발진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자 공주 교회는 침체되었고, 명선학당은 거의 폐지 지경에 이르렀다. 1906년 10월 마지막날 스크랜톤 선교사, 밀러(Miss L. A. Miller)선교사, 윌리엄즈(F. E. C. Williams, 우리암) 선교사, 노병선, 오성근 등이 학교사업관계로 공주를 방문하여 명선학당를 재조직하여 학교 이름을 중흥학교로 개명하였고, 1907년 또 다시 영명학교로 개명하게 되어 교장에 윌리엄즈 선교사, 교사로 윤성렬이 일하게 되었다. 또한 명선여학당은 샤프 부인의 귀국 후에 서원보 선교사와 결혼하여 1906년 내한한 스웨어러 부인(M. S. Swearer, 서사덕)에 의해서 운영되다가 1907년 영명여학교로 개명하게 되었고, 1908년 다시 내한한 사애리시 선교사가 맡아 운영하게 되었다.
1906년 11월 이후 스웨어러 선교사 부부, 윌리엄즈 선교사 부부, 케이블 선교사 부부, 테일러(C. Taylor, 대리오)선교사 부부, 번스커스(James Dale Van Buskirk, 반복기) 의료 선교사 부부 등이 공주에 주재하면서 공주를 중심으로 전도·교육·의료 활동을 전개하여 명실상부한 충청도의 선교 거점 도시로서의 자리를 확실히 굳혀가는 가운데 공주교회는 대부흥운동과 백만명구령운동의 영향속에서 뜨거운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1909년 공주 교회는 최초의 예배당인 협산자 예배당(挾傘者 禮拜堂)을 건축하였고, 1910년부터 1911년까지 봄까지 공주교회내에서 협성신학교의 이동수업이 진행되어 명실상부한 감리교회의 중심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공주지역에는 1905년 이전에 우성면 도천리에 해포교회가 설립되었고, 1906년 10월 이후 우리암 선교사의 전도로 계룡면 경천리에 살던 김병제가 예수를 믿게 되어 김병제에 의해 경천교회가 설립되었는데, 1907년연말에는 경천교회내에 학교가 설립되었다.
논산지역은 1903년 내지 1904년에 맥길 선교사가 공주교회 교인이었던 김상문을 대동하고 논산의 서익보(참판)댁에 내왕하여 서익보와 수명의 유지의 협력으로 조감역의 대지를 매입하여 놀미(현 논산제일교회)교회를 설립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구로교회와 육곡교회도 설립되어졌다. 1906년 10월 스크랜튼 선교사, 밀러(Miss Miller Lula Adelia) 선교사, 윌리엄즈 선교사, 노병선, 오성근 등이 학교사업관계로 공주를 방문하였을 때 놀미교회에 설립된 진광학교와 영화여학교에 노병선의 도움으로 유능한 교사 한 명을 알선해 주기도 하였고, 1907년 초 우리암 선교사가 서원보 선교사와 함께 논산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강경지역은 1908년 강경포(현 강경제일)교회가 설립되었다. 우리암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만동학교의 설립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1913년 3월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고, 1913년 만동여학교가 시작되었다. 또한 호남의 첫 관문인 전북 여산의 황산지역이 강경 지역에 편입됨에 따라 1913년 미 감리회에서는 선교지 분할 협정에 따라 황산지역에 세워졌던 남 장로회의 황산교회를 양도해 달라고 요청하여 예수교장로회 죠션전라노회로부터 양도받아 강경포교회와 합동하였는데, 합동직후 황산교회에서 모이게 되었다. 이러한 황산교회의 양도는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사이에 맺은 선교지 분할 협정의 마지막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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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2]공주 영명중고등학교와 선교사의 발자취 (2)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기까지 35년 동안 공주 선교를 담당한 윌리엄즈(F. E. C. Williams, 우리암) 부부가 1906년 10월 공주에 왔다. 이듬해 스웨어러와 테일러(C. Taylor, 대리오), 케이블(E. M. Cable, 기이부) 가족이 합류했고, 계속해서 밴버스커크(J. D. Van Buskirk, 반복기), 아멘트(C. C. Ament, 안명도), 파운드(N. Found, 방은두), 보딩(M. P. Bording, 보아진), 사우어(C. A. Sauer 사월), 올드파더(J. Oldfather, 오파도) 등이 내려와 공주 선교를 담당하였다.
공주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제일 큰 관심을 보인 것은 학교 건립이었다. 샤프 부인은 공주에 오자마자 1905년 가을부터 자기집에서 여학생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바로 `명선여학교`(明宣女學校)의 시작이다. 그는 1906년 남편을 잃은 후 미국으로 들어갔다가 1908년 다시 공주에 나와 일제말기 추방될 때까지 남편 몫까지 공주 선교에 헌신, 한국인들 사이에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으로 불렸다. 그녀는 명선여학교 후신인 영명여학교에서 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이곳 출신으로는 병천의 시골소녀 유관순, 해방후 중앙대를 설립한 임영신, 한국 최초 여자 경찰서장을 역임한 노마리아, 중대부속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박화숙, 한국인 최초 여자 목사 전밀라 등이 있다.
그동안 영명학교 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1921년 일제시대 건물인 영명실수학교 교사 건물이 작년 6월말에 학교 당국의 현실논리에 의해 철거되었다. 원래 르네상스 풍이었던 이 건물은 미국 선교부에서 보내준 `선교 1백주년 기념선교기금` 2만 5천 달러로 지어 1921년 10월 15일에 봉헌한 건물로 다락이 있는 양철지붕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었다. 지금은 철거된 건물터 입구 양쪽에 기념비들이 서 있다. 오른쪽의 `황인식 교장 공덕비`는 황인식 장로가 1949년 교장이 되어 영명의 재건 작업을 완료한 후 1957년 정년 퇴임할 때 영명 동창들이 세웠다. 같은 해 영명 동창들은 `창립자 우리암 선생 공덕비`도 세웠다. 이 공덕비는 1미터가 넘는 화강암 기단을 가지고 있어 어색한 모습인데 이 기단은 원래 1936년 우리암 교장의 근속 30주년을 기념해 만든 흉상을 얹어 놓았던 동상대였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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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9]공주 영명중고등학교와 선교사의 발자취 (3)
이곳에는 1985년에 새로 제작해 세운 윌리엄즈 흉상이 있다. 일제 말기에 쫓겨갔던 위리엄즈는 해방 직후 미군정청 농림부 자문위원으로 들어와 군정 초기 정부조직에 참여하였고 그의 아들(George Zur Williams, 우광복)도 해군대령으로 함께 들어와 영명 재건작업을 지원하였다.
윌리엄즈 동상 왼편에는 영명학교의 전신인 명선여학교 설립자 샤프 부인을 기념하는 `사애리시선교기념비`(史愛理施宣敎紀念碑)가 있다. 1938년 9월 2일 그의 선교 30주년을 기념해서 세운 것이다. 이 비석도 일제 말기 수난 중에 넘어졌던 것을 1985년에 새로 기단을 만들어 세웠다.
사애리시의 여학교와 함께 남학교는 1906년 10월 15일 윌리엄즈가 하리동 한옥에서 `중흥학교`(重興學校)로 시작하였다. 먼저 내려와 있던 윤성렬과 역시 배재 출신으로 윌리엄즈의 어학선생으로 함께 내려온 안창호가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7년에 학교 이름을 `영명학교`(永明學校)로 바꾸었고 1915년 남녀 공학의 초등과와 고등과를 설치했다.
윌리엄즈는 `실천적인 학문`을 강조했다. `자기 학비는 자기가 번다`는 것이 그의 교육지침이었다. 이를 위해 학교 안에 농장, 가축장, 양잠실, 공구실, 재봉실, 요리실 등을 만들었고, 미국 텍사스 석유회사와 연결을 맺고 학생들에게 `석유장사` 일자리까지 알선했다. 1932년에 고등과를 `영명실수학교`(永明實修學校)로 바꾼 것도 이같은 교육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교를 돌아 국립공주박물관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학교로 들어가기 전 오른쪽 언덕에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일명 `앵산공원`(櫻山公園)이라 한다. 이 언덕 마루에 `공주 4·19혁명기념탑`이 어색하게 서있고 그 앞쪽으로 1959년 `공주의 뜻 있는 젊은이들`이 세운 황인식 선생 교육공로비가 철창살에 갇혀 있다.
현재 일제시대에 지은 학교 건물들은 하나도 남지 있지 않고 다만 공주의 명물이었던 선교사 `양관`만이 한 채 남아 있다.
이 집에 살았던 아멘트는 1917년 내한해서 공주, 천안지방 감리사를 오랫동안 지냈는데 지방에 다닐 때마다 오토바이에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서적을 담은 상자들을 싣고 다녀 한국인들에게 `책 궤짝 감리사`로 불렸다. 아멘트는 1940년 쫓겨 들어가면서 이 집을 양재순에게 넘겼다.
영명 출신으로 공제의원을 경영하고 있던 양재순은 이 집에서 병원을 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해 해방 후 공주사범학교(현 공주교육대학교)에 팔았다. 그후 사범학교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얼마 전 개인에게 넘어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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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appears from the Dong-A Prime Dictionary that 重興 (중흥) ≠ renaissance, restoration (despite the use in «`중흥학교`(重興學校)» which appears possibly to be the restoration or renaissance of the school started by Alice J. Hammond Sharp [Check out this assumption], which she temporarily left upon the death of her husband, Robert Arthur Sharp, March 16,1906). According to the Dong-A Prime Dictionary, 中興 (중흥) = renaissance, restoration. 重 = 무거울 중major / 中 = 가운데 중middle, center. 興 = 일어날 흥rising day. Perhaps the formulation 重興is more poe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