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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아 선교사
민노아 선교사는 충북선교의 개척자이다. 1885년 언더우드 목사가 우리 나라에 입국한 뒤 7년만인 1892년에 선교사로 입국했다.
1900년 민노아 선교사는 장로교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은 충청도 지방에 선교의 뜻을 두고 청주지역 선교 답사팀을 모아 청주읍 시장을 답사한 후 청주에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심하고 선교본부에 청주선교부를 신설하는 것을 신청했다.
1904년 민노아 선교사는 청주로 내려와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민노아 선교사는 서울에서 교육 사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인재 양성에 큰 관심을 두었다. 또한 ‘소민병원’이라 부르는 병원을 짓고 의료 선교도 시작했다. 그리고 ‘민노아 성경학원’을 개설하여 성경 교육을 통해 교회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그는 1937년 71세를 일기로 소천하기까지 45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33년동안 청주에서 살았다. “내가 죽게되면 내가 제일 사랑하는 청주에 묻어달라” 유언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구한말 어려운 시기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이 땅에 찾아와 봉사한 그가 뿌린 씨앗은 충북 기독교의 토대를 구축하고 일신학원 산하 청소년 교육의 도장을 형성하는데도 크게 공헌했다. 그의 시신은 청주시 금천동 뒷산에 안장되었으나 1985년 금천동 땅을 일반인이 소유하게 되면서 그 해에 일신여고 교내 양관 옆으로 옮겨 졌고 현재 그곳에 그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http://cafe.daum.net/sammul2006/JEjt/63?q=%B9%CE%B3%EB%BE%C6%20%BC%B1%B1%B3%BB%E7 – 사진 많이 있음
민노아(뮐러) 선교사를 찾아서|기독교 자료실
두레박|조회 25|추천 0|2009.11.25. 19:57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면 1902년 12월 선교사 민노아와 김홍경 조사가 경기남부지방을 순회 전도하던중 임진오,김완연 두분의
신자를 얻어 교회를 설립하니 서리교회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07년전 안성제일장로교회가 있게 한 민노아 선교사는 누구인가 항상 궁금했습니다.
마찬가지 궁급증을 가지고 계신다면 저와 함께 민노아(뮐러) 선교사를 만나러 가보실래요?
프레드릭 S. 밀러(민노아) 선교사는 186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하여, 피츠버그대학과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한 후 1892년 11월 15일 부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1893년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로아 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발전시켰다. 안창호선생을 길러내는 등 기독교 교육에 힘썼다. 1895년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청주지역에서 44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2년에는 장로회·감리회의 연합찬송가 제정을 위한‘통합공의회 찬송가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에는 찬송가 307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작곡하였다. 이밖에도 94, 294, 379 516장 등이 현재 찬송가에 실려 있다. 191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충청 노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894년 밀러는 현재의 양화진 묘역 주변에 언더우드 선교사, 에비슨 선교사 등과 공동으로 별장용지를 구입하여 각기 방갈로를 짓고 여름철에는 이곳에서 지낸 일이 있어 양화진과는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첫 부인 안나 밀러가 별세한 후 F. S. 밀러는 1904년 제3대 정동여학당장 도티와 재혼하였으며, 1931년 도티와 사별한 뒤 딘과 다시 재혼하였다. 그는 충북지역에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하던 중 1936년 은퇴하여, 개인적인 선교여행을 하였으며, 1937년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민노아 선교사, 청주제일교회 설립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