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애양병원의 역사
여수애양병원 원장 김인권
애양원의 영문 명칭은 Wilson Leprosy Center and Rehabilitation Hopsital 이며 그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나병 곧 한센병을 치료하는 곳이며 또한 한센병과 그 외의 여러 재활이 필요한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다. 애양원의 시작은 1909년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의사인 윌리 포사이드가 길에 쓰러져있는 한센병환자를 자신이 말에 태우고 광주 제중원의 선교사로 있는 윌슨에게 데려옴으로 시작한다. 한센병은 유전병이거나 저주에 의하여 발생되었거나 아니면 죄에 대한 형벌로 발생한다고 알려져 왔었으나 1873년 노르웨이의 과학자 아마우에르 한센이 나병의 원인이 되는 균을 발견함으로써 균에 의하여 발생하는 전염병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1897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국제 나학회에서 그 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찿을 수 없어 이 병의 확산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격리라고 결론을 지어 일정한 수용소를 만들어 그곳에 강제 격리기로 결정지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한센병에 이환되면 가족과 지역사회에서 쫒겨나 환자들끼리 작은 집단을 만들어 유리 방랑하고 있는 상태로 이 한센병환자 집단은 일반 사회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윌슨에게 데려온 이 한센병환자 역시 제중원에 입원 시킬 수 없어 건축용 벽돌을 굽기 위하여 만들었던 벽돌가마에 간단한 방을 만들어 치료하였고 이것이 우리나라에서의 처음 한센병환자를 서양의학으로 치료한 사건이다. 그 후 1911년에는 정부로부터 나병원 인가를 얻어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주 나병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선교사들에 의하여 대구와 부산에 나병원이 건립되었고 정부를 움직여 1916년 소록도에 국립 나병원이 건립되게 하였다.
광주에 한센병을 치료 할 수 있는 병원이 생겼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광주로 모이게 되었고 이것은 광주 시민들을 불안하게 하여 보다 한적한 곳으로 이전을 요구하게 되었다. 적당한 장소를 수소문한 결과 여수 신풍리의 작은 반도를 발견하여 새 병원과 교회를 중심으로 환자들의 숙소를 짓고 1926년 이전을 시작하였다. 교통편을 이용할 수 없었던 600명의 한센병 환자들은 일반의 문을 피해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 도보로 1928년 이전을 마칠 수 있었다. 한때 1200명에 달하던 애양원의 한센병환자는 영양과 위생의 개선과 1950년대에 발견한 새로운 항균제로 인하여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고 많은 환자들이 치유되어 자활촌을 만들어 퇴원하게 되었다.
1959년 애양원에 온 토플선교사는 정형외과의사로 그 당시 우리나라에 만연하고 있었던 소아마비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였고 1967년 미국 교회의 도움으로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재활병원을 신축하여 한센병환자와 일반 소아마비 환자를 같이 입원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획기적인 시도로 아직도 일반인들의 한센병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을 때 이런 시도를 함으로써 한센병이 일반인들에게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하여 한센병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을 해소 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 훌륭한 의료와 저렴한 수가로 전국의 소아마비 환자들에게 소문이 나서 덕양역에는 애양원을 찿아오는 장애인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이제 한센병도 또 소아마비 후유증 환자들도 다 이 땅에서 거의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는 환자들은 애양원에 찿아 와 치료를 받고 또 필요한 수술을 받고 있다.
그 후 애양원은 인공관절 수술에 관심을 돌려 미국에서 새로 개발된 인공관절 기구들을 선교사들을 통하여 저렴하게 직접구매하여 보험이 보편화되어있지 않던 1980년대의 환자들에게 최신 기구를 저렴한 의료비로 치료하여 월등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전통과 명망이 이제 의료보험이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는 현재에 와서도 환자들의 신뢰를 얻어 전국에서 제일 많은 수술을 하는 병원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또 병원의 이윤보다는 초기 선교사들이 이 병원을 설립할 때의 정신을 계승하여 보다 많은 환자들에게 양질의 의료를 저렴하게 제공하고저 노력하고 있으며 이로써 전국에서 제일 저렴하게 인공관절 수술을 할 수 있다는 명망을 유지하고 있다.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희생한것과 같이 우리도 어려운 나라에 도움을 주고기 위하여 1993년부터 중국을 위시하여 베트남 미얀마에 정기적으로 의료 봉사를 하고 있으며 그곳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연수시키고 있다. 또 우리나라 또는 일본이나 중국 등의 많은 젊은 의사들이 우리병원에 견학을 오고 있다.
또 애양원은 순교자 손양원목사가 시무하던 곳이다. 손양원목사는 애양원의 2대 목사로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5년여의 감옥생활을 하였고 그 후 여순사건 때 두 아들을 잃었고 자신은 6,25전쟁 때 환자들과 같이 있다가 순교하였다. 이 손목사의 행적은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 훌륭하게 기릴 만한 업적이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손목사의 신앙을 기리기 위하여 애양원을 찿고 있다.
애양원은 초기 미국선교사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병원의 확충보다는 작은 형태를 유지하며 작은 인원으로 보다 많은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또 병원의 역사 박물관과 한센병 기념관을 조성하였고 손양원목사 기념관 및 기념공원을 조성하는데 기여하여 우리병원이 병원으로써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여수의 자랑거리로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싶어하는 장소로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다.